본관은 적성(積城). 호는 토굴처사(土窟處士)·방재(方齋). 아버지는 이수익(李守益)이다.
임진왜란 때 5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여의고, 재종형 현감 이형진(李亨進)과 정홍명(鄭弘溟) 문하에서 수학하고, 자라서는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광해군대에는 영창대군사건에 반대의 소를 올린 바 있고, 인조대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의병을 규합, 군량을 보급하였다. 정묘호란 때에는 정랑 고순후(高循厚)와 거의하여 의병청유사(義兵廳有司)가 되었으며, 소현세자를 완산으로 호종하여 적이 물러간 뒤 여산에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병자호란 때에는 가동(家偅) 100여 명을 모아 군량을 청주까지 운반하였다. 강화가 이루어진 뒤 종신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뒤에 유일(遺逸)로서 장령(掌令)이 되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행이 지극하였다. 저서로는 『명륜합편(明倫合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