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계첨(季瞻). 생원 이계인(李啓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간 이사경(李士慶)이다. 아버지는 형조참판 이후산(李後山)이며, 어머니는 참찬 김수현(金壽賢)의 딸이다.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높은 학덕으로 인하여 동료들의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그 뒤 연이어 친상을 당하여 시묘를 극진히 하다 병을 얻어, 오랫동안 외가인 부여에 우거하다가 문음(門蔭)으로 벼슬길에 올라 효릉참봉(孝陵參奉)이 되었다.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곧 문한관(文翰官)이 되어 『현종개수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다음해에 국장감조관(國葬監造官)으로 활약하여 전적에 발탁되었고, 이어서 예조·병조 좌랑을 거쳐 1684년 사헌부지평이 되어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곧 지평으로 재기용되어, 휼민(恤民)·둔전(屯田)·수령전최(守令殿最: 수령들의 근무성적의 평가)에 따른 문제점의 개선책을 연이어 상소하여 왕의 칭찬을 받았다. 그 뒤 성균관직강을 거쳐 사간원정언이 되어 당시의 재상들의 불법을 논하다가 일시 파면되기도 하였다.
비변사낭청을 거쳐 1686년 평강현령이 되어 혜정(惠政)을 베풀었으나, 병을 얻어 사직하고 귀향, 다음해에 죽었다. 평소 학문을 좋아하여 늘 『통감강목(通鑑綱目)』·『논어』와 주자(朱子)의 저술을 깊이 탐독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