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방옹(放翁), ·부휴자(浮休子), 호는 청파(靑坡). 이강(李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이원(李原)이다. 아버지는 사간 이지(李墀)이며, 어머니는 정보(鄭保)의 딸이다.
1459년(세조 5) 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한 뒤, 지리산에 들어가 힘써 학문을 닦았다. 1464년(세조 10) 춘방 문과에 장원 급제해 겸예문에 선발되고,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이 되었다.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 이듬해 왕명을 받아 안효례(安孝禮) 등과 도성의 지도를 작성하였다.
1468년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응교를 지냈다. 예종이 즉위하자 장령이 되어 「형국사목(刑鞫事目)」을 작성했으나 피혐(避嫌)으로 물러났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겸예문에 다시 선발되고, 사헌부 재직시 시폐(時弊)를 진언한 공으로 품계가 올랐다.
1471년(성종 2) 장례원판결사에 등용되고 당상관에 오른 뒤, 이어서 대사성·공조참의를 거쳐 1477년 충청도관찰사에 부임하였다. 다시 예조·이조·호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병조참지·형조참의를 지냈다.
1484년 가선대부로 승급, 경상도관찰사·한성부우윤을 지내고, 1488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서반으로 옮겼다가 그 해 형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490년 예조참판이 되어 정조사(正朝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병조참판·형조참판을 지냈다. 1494년 성종이 죽자,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서 동지춘추관사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1495년(연산군 1)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대사헌에 등용되어 여러 가지 시폐의 시정을 건의하였다. 그 해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연산군 즉위에 소극적이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그 뒤 한성부의 좌윤·우윤, 호조참판·병조참판을 지냈다.
성품은 정한(精悍)했으며, 행정 수완이 있었고, 시와 문장에 능하였다. 그러나 도량이 좁았으며, 축재에 힘쓰기도 했다 한다. 저서로는 『청파집』·『청파극담(靑坡劇談)』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