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규형(圭亨). 전라남도 장성 출신. 1919년 3월 무송현(撫松縣) 길림성군정서(吉林省軍政署) 흥업단(興業團) 적십자사 회계서기로 일하면서 흥업단장 김호(金虎)의 명을 받고 이시영(李始榮) 외 1명과 함께 안동현(安東縣)에서 만주로 건너오는 애국청년 약 400∼500명을 모집하여 백산학교(白山學校)에 입학시켰다.
1920년 11월 초순경 김호와 흥업단의 외교부장 김창규(金昌奎)의 비밀명령을 받고 군자금 20만원을 모금할 목적으로 환인현(桓仁縣)의 한교회장(韓僑會長) 손경진(孫庚辰)의 협조를 받아 김인제(金仁濟) 외 2명을 대동하고 12월 하순경을 전후로 하여 상인으로 가장, 국내에 들어왔다.
경상남도 밀양·양산과 경상북도 대구·달성 등지를 본거지로 하여 손기성(孫基聖) 외 15명의 청년들을 가입시켰다. 또한, 동래·밀양·양산·청도·영천·달성 등지의 부호 가택에 들어가 240원을 모금하여 이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하였다.
1922년 4월 하순 김우창(金佑昌)·이재술(李再述)과 함께 권총 2자루, 실탄 47발을 가지고 경상북도 봉화로 군자금을 모금하러 가다가 그해 5월 27일 군위군에서 일본경찰에 잡혔다. 1923년 1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