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대림(大臨). 이진우(李眞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광보(李匡輔)이다. 아버지는 이성순(李性淳)이며, 어머니는 정광익(鄭光益)의 딸이다.
1783년(정조 7) 생원으로 증광문과에 장원하였고, 이듬해 홍문관에 들어가 응교(應敎)·교리(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1787년에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이조참의에 보직되었다가 1789년에 대사성에 특진되었다.
그 뒤 1792년에는 영천군수(榮川郡守)로 나갔다가 그 이듬해에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관리의 명단작성을 소홀히 하여 판서·참판과 함께 파직되었다. 곧 이어 복직하여 동부승지가 되고, 1794년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우부승지가 되었으나, 능에 제사지낼 때 제헌관에 대한 감독 불충분으로 제사절차에 차질을 초래하여 파직되었다.
1797년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기일 안에 부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성현(金城縣)에 유배되었다. 1799년에 방환되어 다시 승지가 되었고, 1803년(순조 3) 이조참판에 올랐다. 다음해 형조참판이 되어 충청도안핵사를 겸직하였다.
1805년에 호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평안도관찰사·한성부판윤·사헌부대사헌을 거쳤다. 그 뒤로 형조판서·호조판서를 비롯하여 육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이조판서로 있다가 병으로 조윤대(曺允大)와 체임되었으며, 1812년에 의정부우참찬에 올랐다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