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규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광윤(光潤)
시호
안광(安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97년(연산군 3)
사망 연도
1560년(명종 15)
본관
고성(固城)
주요 관직
형조판서|예조판서|병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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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광윤(光潤). 우의정 이원(李原)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의영고영(義盈庫令) 이순(李峋)이다. 어머니는 하동정씨(河東鄭氏)로 정문언(鄭文彦)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19년(중종 14) 생원 · 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대교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이어서 홍문관부수찬 · 수찬으로서 활발한 정계활동을 폈으나, 1531년 김안로(金安老)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벼슬길이 막혔다.

1537년 김안로가 제거되면서 사헌부장령에 다시 등용되었고, 이어서 승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동부승지 · 좌부승지 · 좌승지를 역임하고 1541년 한성부우윤에 올랐다.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귀국하면서 조맹부(趙孟頫)의 그림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를 구입, 국왕에게 진상하였다.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 인종이 즉위하자 도승지에 발탁되었고, 명종 즉위 후 1547년(명종 2) 함경도관찰사로 나가서 북도민의 민폐시정에 힘썼으며, 특히 도민의 큰 부담이었던 다시마 진상을 중지시켰다.

그 뒤 지돈녕부사 · 대사헌 · 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551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이듬해 대사헌을 다시 역임하고, 형조 · 예조의 판서를 거쳐 1554년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여 3년 동안 민정을 주관하였다.

1557년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시 건너가 대비의 고명(誥命)을 받아 왔고, 그 공로로 숭정대부에 올랐으며, 판돈녕부사와 병조판서에 특채되었다. 행서 · 초서에 능하였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솜씨가 있었다. 시호는 안광(安匡)이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인재집(忍齋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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