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규

  • 역사
  • 인물
  • 조선 전기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광윤(光潤)
  • 시호안광(安匡)
인물/전통 인물
  • 본관고성(固城)
  • 사망 연도1560년(명종 15)
  • 성별남성
  • 주요 관직형조판서|예조판서|병조판서
  • 출생 연도1497년(연산군 3)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최완기 (서울시립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4년 02월 19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광윤(光潤). 우의정 이원(李原)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의영고영(義盈庫令) 이순(李峋)이다. 어머니는 하동정씨(河東鄭氏)로 정문언(鄭文彦)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19년(중종 14) 생원 · 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대교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이어서 홍문관부수찬 · 수찬으로서 활발한 정계활동을 폈으나, 1531년 김안로(金安老)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벼슬길이 막혔다.

1537년 김안로가 제거되면서 사헌부장령에 다시 등용되었고, 이어서 승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동부승지 · 좌부승지 · 좌승지를 역임하고 1541년 한성부우윤에 올랐다.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귀국하면서 조맹부(趙孟頫)의 그림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를 구입, 국왕에게 진상하였다.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 인종이 즉위하자 도승지에 발탁되었고, 명종 즉위 후 1547년(명종 2) 함경도관찰사로 나가서 북도민의 민폐시정에 힘썼으며, 특히 도민의 큰 부담이었던 다시마 진상을 중지시켰다.

그 뒤 지돈녕부사 · 대사헌 · 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551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이듬해 대사헌을 다시 역임하고, 형조 · 예조의 판서를 거쳐 1554년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여 3년 동안 민정을 주관하였다.

1557년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시 건너가 대비의 고명(誥命)을 받아 왔고, 그 공로로 숭정대부에 올랐으며, 판돈녕부사와 병조판서에 특채되었다. 행서 · 초서에 능하였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솜씨가 있었다. 시호는 안광(安匡)이다.

참고문헌

  • - 『중종실록(中宗實錄)』

  • - 『명종실록(明宗實錄)』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 『인재집(忍齋集)』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