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춘헌(春軒). 평안북도 철산 출신. 이창엽(李昌葉)의 아들이다.
1887년(고종 24) 평안북도 정주로 이사하였다. 1892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에 전념하며 육영 사업에도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1902년 정주군상업회의소 소장으로 추대되어 그 곳 사람들의 식산 흥업(殖産興業)과 권익 옹호에 앞장서 신망을 얻었다. 특히,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매입에 극력 반대하고 한국인의 주권(株券) 소유를 주장하였다.
1903년 정주서면교회 집사가 되었으며, 1911년에는 일본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 각계를 직접 돌아보았다. 1912년 일제가 날조한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1916년 덕흥교회 장로가 되어 농장을 경영하며 교회를 세우는 데 힘을 쏟았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는 기독교측에서 참가하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2년형을 선고받았다. 옥고를 치른 뒤 계속 종교·산업·교육에 종사하며 민족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조만식(曺晩植)과 조선민주당을 조직하여 고문에 취임하고, 사재를 처분하여 평동중학교(平東中學校)를 설립, 정계와 교육계에서 활약하였다.
1947년 공산주의자들을 피해 월남, 1954년 한국반공연맹 이사로서 반공 전선에 앞장섰고, 이듬해 평안북도도민회, 3·1정신선양회, 조선민주당, 이준열사기념사업회 등 각 사회 단체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56년에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오산중학건축발기인회(五山中學建築發起人會) 회장을 지냈다. 철저한 기독교인이며 근면인으로서 평생 동안 성서와 농기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근면 절약의 표본으로 1일 2식을 실천한 의지의 생활인이기도 하였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