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량(汝亮), 호는 구포(瞿圃).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 이여(廣平大君 李璵)의 후손이며, 이현록(李顯祿)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권중(李權中)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완성군(完城君) 이의행(李義行)이며, 어머니는 장민익(張民翼)의 딸이다.
한양에서 자랐으며, 1790년(정조 14) 성균관의 유생으로 있으면서 전강(殿講)의 수석이 되었고, 그 해에 증광문과전시에 직부(直赴)하여 급제하였다.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된 이래 홍문록·도당록(都堂錄: 홍문관의 수찬(修撰)·교리 등을 선발하기 위하여 의정부에서 작성한 제2차 추천기록)에 올랐으며, 사간원정언으로 있으면서 민생의 어려움을 이유로 금주를 주장하여 왕의 허락을 얻는 등 활발한 언론활동을 하였다.
1797년 사헌부집의로 있을 때 장문의 상소를 올려 시폐와 왕의 잘못을 숨김없이 극간하였다. 이 상소가 들어오자 대신을 비롯하여 사헌부·사간원 양사에서 시국을 비방한 죄로 끊임없이 탄핵하였으나, 정조가 홀로 이명연의 충성됨을 알아 끝까지 옹호하여주었다.
그 뒤 누차 불렸으나 조신들의 반대로 내직에 들어오지 못하고, 영흥부사를 끝으로 관직생활을 마쳤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두문불출하고 다시는 세상일을 듣지 않았다. 성품이 엄정하여 절의를 숭상하였고, 말만 앞세우고 실천하지 않음을 가장 미워하였다. 문장이 웅대하여 붓을 한번 들면 수천언(數千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