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연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홍문관수찬, 사간원정언, 영흥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원량(元亮), 여량(汝亮)
구포(瞿圃)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58년(영조 34)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홍문관수찬|사간원정언|영흥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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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홍문관수찬, 사간원정언, 영흥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량(汝亮), 호는 구포(瞿圃).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 이여(廣平大君 李璵)의 후손이며, 이현록(李顯祿)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권중(李權中)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완성군(完城君) 이의행(李義行)이며, 어머니는 장민익(張民翼)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한양에서 자랐으며, 1790년(정조 14) 성균관의 유생으로 있으면서 전강(殿講)의 수석이 되었고, 그 해에 증광문과전시에 직부(直赴)하여 급제하였다.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된 이래 홍문록·도당록(都堂錄: 홍문관의 수찬(修撰)·교리 등을 선발하기 위하여 의정부에서 작성한 제2차 추천기록)에 올랐으며, 사간원정언으로 있으면서 민생의 어려움을 이유로 금주를 주장하여 왕의 허락을 얻는 등 활발한 언론활동을 하였다.

1797년 사헌부집의로 있을 때 장문의 상소를 올려 시폐와 왕의 잘못을 숨김없이 극간하였다. 이 상소가 들어오자 대신을 비롯하여 사헌부·사간원 양사에서 시국을 비방한 죄로 끊임없이 탄핵하였으나, 정조가 홀로 이명연의 충성됨을 알아 끝까지 옹호하여주었다.

그 뒤 누차 불렸으나 조신들의 반대로 내직에 들어오지 못하고, 영흥부사를 끝으로 관직생활을 마쳤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두문불출하고 다시는 세상일을 듣지 않았다. 성품이 엄정하여 절의를 숭상하였고, 말만 앞세우고 실천하지 않음을 가장 미워하였다. 문장이 웅대하여 붓을 한번 들면 수천언(數千言)을 썼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노주집(老洲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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