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헌법」에 의하면 국민은 거주 이전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갖는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이사를 해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생기게 된다.
크게는 나라의 사정에서부터 작게는 개인의 사소한 사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아득한 옛날부터 인간은 생활의 근거지를 찾아 유랑하였고, 원시인들은 이곳 저곳으로 먹을 것을 찾아다녔으며, 몸을 의탁할 수 있는 동굴이나 움막 같은 곳을 찾아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이것이 이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원시인들은 농경을 하게 되고 농사짓기에 알맞은 강가의 평야를 따라 이사를 거듭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 뒤 국가가 성립되고 지배자는 도읍을 정하여 국가를 다스려 나가게 되었는데, 사정에 따라 도읍을 옮겨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 나라의 도읍을 옮기면 왕실은 물론 많은 관료들과 그의 가족, 수많은 백성들이 따라서 이사를 하게 된다. 화전민들은 화전자리를 찾아 이곳 저곳으로 옮겨 살았다.
양수척(楊水尺: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생활하던 무리)의 무리들은 버드나무가 많은 곳으로, 한지(韓紙)를 만드는 지장(紙匠)들은 닥[楮]나무가 많은 곳을 찾아 옮겨 살았다.
장사를 생업으로 하는 상인들은 장을 따라 옮겨 갔고, 어부는 어장을 따라, 광부는 광맥을 따라 옮겨 살았다. 국토개발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새로운 도시를 형성하거나 인공 댐을 건설함에 따라 한 마을이 수몰되는 경우에는 어차피 이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공업지대를 형성하거나 새로운 광맥을 발견하여 광산촌을 이루는 경우에도 많은 사람들이 옮겨 사는 이유가 된다.
개인들은 생업이나 전근, 또는 자녀 교육문제 때문에 이사를 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며, 때로는 민간신앙에 따른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이사를 하는 수도 있다.
또한 현대 생활문화의 양상이 달라짐에 따라 핵가족시대를 맞아 혼인과 함께 분가하여 이사를 하기도 한다. 주택문화의 발달에 따라 편리한 주거생활을 하기 위하여 재래가옥에서 새로운 개량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되는 것은 시대의 한 추세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의 선인들은 좋은 조건을 갖춘 집을 찾아 이사를 하였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 보면, “대저 살 터를 잡는 때에는 첫째 지리(地理)가 좋아야 하고, 다음에 생리(生利)가 좋아야 하며, 다음에 인심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은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에서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땅은 아니다.”고 하였는데, 이는 매우 타당성 있는 견해로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그 밖에 땅이 평평하고 흙이 부드러우며 앞에 막힘이 없고 햇빛이 잘 들어야 하며, 뒤쪽으로 북풍을 막아 주는 산이 있고, 여기에 샘물이 좋으면 좋은 집터라 하였다.
원시채집경제시대에는 산야의 열매를 따먹기 위하여 이 들판 저 산천으로 옮겨 다니면서 생활을 하였고, 유목민시대에는 짐승을 먹일 초지를 찾아 정처 없는 떠돌이생활을 하였다. 이것도 인류생활에서 주거의 이동이었으므로 원초적인 이사 행위로 보아야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기(古記)』의 기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늘나라의 상제인 환인(桓因)에게 환웅(桓雄)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늘 하계(下界)에 뜻이 있었다.
이에 상제께서 환웅을 태백산정의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보내어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환웅은 천부인(天符印)과 3,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려왔다.”
이것이 우리 역사 기록에 나타난 이사의 처음이다. 환웅이 3,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완전히 이주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환웅은 삼위태백(三危太伯)의 신단수 아래에 내렸으니 이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땅으로 이사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은 가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던 곳으로, 예로부터 인간은 이처럼 살기 좋은 땅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고구려의 건국설화를 보면, “북부여의 금와왕(金蛙王)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후궁으로 맞이한다. 유화는 햇빛을 받아 잉태를 하여 커다란 알을 낳는다. 금와왕은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하여 버리게 하는데, 짐승들도 이를 밟지 않았다.
나중에 이 알에서 태어난 아기가 주몽(朱蒙)이다. 금와왕에게는 이미 일곱 왕자가 있었는데, 이들은 항상 주몽을 시기하였다.
그리하여 주몽은 부여국에 있지 못하고, 오이(烏伊) · 마리(摩離) · 협보[陜父]와 함께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그들은 졸본성에 이르러 새 나라를 세웠다. 그곳은 땅이 기름지고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서 도읍지로 아주 좋은 곳이었다.”
이 설화는 고주몽이 부여국에서 졸본성으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우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기록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 고구려시대에는 “고구려인들은 그들의 주거를 흔히 산곡에 따라 정하였으며, 즐겨 궁실을 만들고 주거의 좌우에는 큰 건물을 세워 귀신, 영성(靈星), 사직(社稷)을 제사하였다. 민가는 자초(茨草:띠풀)로 이은 이른바 초옥(草屋)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의 주거는 바람을 막아 주고 햇볕이 잘 드는 산골짜기 아래에 많이 지었고, 지붕은 초가지붕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인들은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곳에 이사하여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면, 신라의 탈해왕이 어릴 때 호공(瓠公)의 집을 빼앗아 이사해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즉, “탈해왕이 어릴 때 토함산에 올라 석총(石塚)을 만들고 7일 동안 머물면서 성안에 살 만한 곳이 있는가 하고 바라보니 마치 초승달같이 둥근 봉강(峯岡)이 있어 지세가 왕성한 곳이었다. 내려와 찾아보니 바로 호공의 집이었다.
이에 집을 빼앗기 위하여 지략을 써 몰래 숫돌과 숯을 집 곁에 묻고, 며칠 뒤 그 집 문 앞에 가서 이 집은 우리 조상 때의 집이라고 하였다. 호공은 그렇지 않다고 하여 서로 다투었으나 결말을 짓지 못하여 관가에 고하였다.
관가에서는 무엇으로 너의 집임을 증거로 댈 수 있느냐고 하자, 탈해가 말하길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시골에 가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그 땅을 파보면 알 것이라 하였다. 그 말대로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있으므로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사의 한 가지로 외국에 이민 가서 사는 예도 적지 않다. 신라시대에 신라사람들이 당나라의 산둥반도로 이주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상업을 하며 살았는데, 이 지역을 신라방(新羅坊)이라 하였다. 그리고 신라인이 거주하면서 많은 사원도 건립하였는데, 이를 신라원(新羅院)이라 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의 무왕은 그 출생이 기이하다. 그 어머니가 부여의 남지변에서 홀로 살 때 연못 속의 용이 나와 간통한 뒤에 태어났다. 이름을 서동(薯童)이라 하였고, 마[薯]를 팔아서 생활하였다.
이 때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서라벌까지 이사를 갔다. 여기에서 마를 팔며 아이들과 같이 「서동요(薯童謠)」를 지어 퍼뜨렸다.”는 기록이 있다.
선화공주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동이 서라벌로 이사를 간 역사적 기록이라 하겠다. 고려 건국설화에는 왕건까지 7대 시조들의 이야기가 『고려사』 첫머리에 실려 있는데, 그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6대조 강충이 마하갑(摩訶岬)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하루는 신라의 감간(監干)인 팔원(八元)이라고 하는 이가 이곳에 들렀다. 그는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이었다. 팔원은 부소산 일대의 산세를 살펴보고 강충에게 말하였다.
‘만일 이 산 남쪽으로 이사하여 그곳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 바위가 보이지 않게 한다면 틀림없이 삼한을 다스릴 인물이 나오게 될 것이오.’
이 말을 들은 강충은 마을 사람들과 같이 팔원이 가르쳐 준 대로 산의 남쪽으로 이사를 갔다. 강충의 증손 작제건(作帝建)의 아들 융(隆)은 송악산 기슭에 있는 옛집에서 살다가 그 남쪽에 새집을 짓고 이사하려 하였다.
바로 이 때 도선(道詵)대사가 당나라에서 일행지리법(一行地理法)을 배워 가지고 와서 백두산에 올랐다가 곡령(鵠嶺)에 이르러 융의 새집을 보고 말하였다.
‘아, 아까운 일이구나! 기장[穄]을 심을 곳에 어찌하여 삼[麻]을 심었을까?’ 도선대사가 이렇게 혼잣말처럼 하고 지나가는 것을 융이 듣고 달려가서 물었다.
도선대사가 말하기를 ‘이곳의 지맥이 백두산에서부터 수모(水母)와 목간(木幹)을 이었으니, 이 아래 기슭이 명당자리임에 틀림없소.
그대는 수명(水命)이니 마땅히 물의 대수(大數)를 좇아서 집을 짓되 36칸을 지으면 곧 천지의 대운수에 따르게 될 것이오. 내년에는 틀림없이 성스러운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이라 하시오.’라고 하였다.
도선이 돌아간 뒤 융은 그가 말한 대로 다시 집을 고쳤다. 그런 다음 그곳으로 이사가서 살았다.” 이상의 예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사를 하여 크게 성공한 예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새 나라를 건설하자 구 왕조의 왕씨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에 왕씨 성을 가진 왕족들은 왕씨 성을 숨기기 위하여 ‘왕(王)’자에 가획하여 옥(玉) · 전(全) · 전(田) 등으로 성을 바꾸어 경향(京鄕)각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백성을 신개발지로 이주시킨 예도 있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1434년(세종 16)부터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6진을 개척하게 하고, 여기에 전국의 백성들을 뽑아 이주시켜 살게 하여 두만강변의 국경을 튼튼하게 하도록 하였다.
또 1435년에는 농사에 종사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을 그 가족과 함께 북방의 여연(閭延)으로 옮겨 살게 한 적도 있다.
국가의 관리로서 임지에 부임하여 사는 경우도 있었는데, 단신으로 부임하여 사는 경우도 있었으나, 솔가(率家:온 집안 식구를 데려가거나 데려 옴)하여 이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나라에 죄지은 자를 낙도나 오지로 유배시켜 살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쟁이나 난리를 당하였을 경우 백성들은 살길을 찾아 으슥한 산속이나 혹은 외딴 섬으로 피난을 가서 살기도 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보면, 수많은 백성을 섬으로 옮겨 살게 하고 농토를 일구어 생계를 유지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권세를 손아귀에 쥐고 세도를 부리던 자도 시대가 바뀌거나 권력이 무너짐에 따라 낙향하거나 산천에 은거하여 살게 되는데, 이것도 이사의 한 경우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탄압과 가난에 못 이겨 만주의 북간도 등지로 이주하여 간 사람들도 많았으며, 지금도 길림성(吉林省) 등지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다. 또 그 당시 노동을 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도 많으며, 멀리 하와이로 이주하여 간 사람들도 많았다.
일본의 북쪽, 소련 땅인 사할린 섬에는 그때에 이주하여 간 우리 동포들이 고국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다. 또한 현대에 와서도 이민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 동포가 이민을 많이 가 있는 곳으로는 북미의 미국을 비롯한 캐나다, 남미의 브라질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많이 살고 있고, 그 밖에 동남아의 여러 나라와 멀리 유럽과 아프리카 등지에도 진출하고 있다.
국내에서의 대대적인 이동도 이사의 예로 들 수 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제 고향을 찾아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일본으로 끌려갔던 사람들과 날품을 팔기 위해 건너갔던 사람들이 광복의 환희와 감격에 젖어 귀환선을 타고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이른바 귀환동포들이다.
이들 중에는 고향과 옛집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처할 집이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생계를 기약할 수 없는 처지에 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적당한 빈터를 찾아 가건물을 짓고, 고달픈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만주의 북간도로 갔던 사람들도 돌아오기 시작하였으나 처지는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동포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한편,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 정착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또한 이 무렵,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해외로 나갔던 사람들도 돌아오기 시작하였는데, 중국 · 미국 등지에서 활약하였던 독립투사들이 하나, 둘 돌아와 국내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전쟁이 터졌다. 그 당시 피난민 수는 1,000만 명이 넘었고, 월남피난민도 60만 명이 넘었다.
전쟁고아는 국내의 고아원에 수용되기도 하였으나, 많은 수의 고아들이 외국인들의 주선으로 외국에 수용되거나 입양되기도 하였다.
전쟁의 와중에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피난민들은 부산과 경상남도 일부 지방에 몰리게 되었는데, 살아갈 터전이 없기에 산꼭대기나 강바닥에까지 판잣집을 짓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 당시 부산으로 피난갔던 사람들은 국제시장이나 자유시장, 자갈치시장 등에서 행상을 하거나 좌판을 벌여 겨우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는데, 지금은 기반을 잡고 부산이 제2의 고향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경우는 전쟁으로 인하여 원하지 않은 이사민이 된 경우라 할 것이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국내 사정은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가난에 허덕이던 삶에서 잘 살아보자는 경제개발정책이 성공함에 따라 공업도 눈부시게 발전하여, 도시에는 커다란 공장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특수지역에는 공업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농어촌의 인력들이 공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함으로써 농촌인구가 도시로 집중하는 새로운 이주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농어촌의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해 공원으로 취업함에 따라 농사나 어업에 종사하여야 할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상마저 빚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특히 농촌의 소작인들이 살던 초가집이 텅빈 채 폐가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농촌인구의 도시 집중이라는 현상마저 낳게 되어, 정부에서는 도시인구의 억제정책을 쓰게 되었다. 정부는 농촌으로 돌아가 영농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조금을 주어 이를 장려하였고, 농어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영농(營農) · 영어(營漁) 자금을 빌려 주어 이들의 생산활동을 장려하였다.
또한 농어촌 주민들이 도시의 공장에 취업하기 위하여 도시로 몰리는 바람에 도시는 심각한 주택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택이나 셋방을 소개하는 복덕방이 성업을 하게 되었다.
이사하는 사람들이 날로 불어남에 따라 또 새로운 직종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삿짐을 옮겨 주는 이른바 ‘이삿짐센터’가 바로 그곳이다. 이들은 이삿짐을 차에 실어 옮기고 다시 들여놓아 주는 일까지 맡아 함으로써, 직장생활에 바쁜 도시인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문화 중에 이사풍속만큼 다양한 것도 드물다. 우리 나라의 이사풍속은 이사 전 풍속과 이사 때 풍속, 이사 후의 풍속으로 나누어진다.
이사 전 풍속을 살펴보면, 옛사람들은 먼 곳으로 출타할 때와 이사할 때에는 일진(日辰)과 방위(方位)를 보아 날짜를 정하였다.
만약 일진이 나쁜 날에 출타를 하거나 이사를 하게 되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 여겼다. 그래서 출타나 이사, 재액 등의 방위를 맡고 있는 신이 어느 쪽에 있는지를 살피고, 혹시 그쪽으로 가게 된다면 미리 그쪽 방위신에게 양해를 구했다.
날수에 따라 사방위를 돌아다니면서 사람의 활동을 방해하는 귀신을 옛사람들은 ‘손’이라 불렀는데, 손 없는 방위와 일진을 보아 길일(吉日)을 택하는 데는 이런 일에 능통한 집안 어른들이나 친지 혹은 이웃사람들에게 의논을 하거나, 지관(地官:풍수설에 따른 집터나 묏자리 등을 가려 잡는 사람)이나 점술가(占術家) · 무당 등 이런 방면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서 행하였다.
만약에 물어보아서 이사갈 방향에 손이 있거나 액운이 따라 불길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면 이사를 하지 않고 기다려 좋은 날을 택해 이사를 하였다.
옛날 우리 선인들은 그믐날은 그 달의 마지막 날이어서 아무런 액운이 따르지 않는 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음력으로 윤달은 가외의 달이므로 아무런 재액이 없는 날이라고 생각하였다.
우선, ‘이사 전 풍속’의 사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나이 · 운수 · 날짜 · 일진 · 방위 등이 맞지 않으면 이사하지 않는다.
② 세 살(歲煞:해에 따라 독한 음기의 살이 있다는 방위) · 겁살(劫煞:삼방살의 한 방위에 끼는 독하고 모진 기운) · 재살(災煞) 등 이른바 삼살방위(三煞方位)에 있을 때는 이사가지 않는다. ③ 이사갈 때는 반드시 길한 날을 택일하여 간다.
‘이사 때 풍속’의 사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솥 안에 요강을 넣어간다. 솥 안에 요강을 넣어가는 행위는 주술적인 의미가 크다.
솥과 요강은 인간의 기본적인 생리조건을 담당하는 근본적인 기구이니, 생활이 순탄하게 이어져 가기를 바라는 뜻이라 하겠다. 또 요강은 오줌을 뜻하는 것인데, 이는 부정(不淨)을 억누르는 주력(呪力)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② 이사를 와서 큰방에 밥솥을 먼저 들여놓는다. 밥솥은 생명과 직접 관계가 있는 것이니 우대하였음은 물론이고, 밥솥에 가득찬 밥은 풍년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새로 이사를 하면 솥 거는 일을 중요시하였고, 이것도 길일을 택하여 행하였다. 솥을 걸고 나면 이삿짐을 다 옮기지 않아도 이사를 한 것으로 쳤다.
③ 밥그릇에 쌀을 담고 가운데 촛불을 켜서 요강 안에다 넣고 이사간 집의 방 가운데에다 둔다. 쌀은 물론 풍년을 비는 것이고, 촛불은 가운(家運)의 융성을 비는 뜻이며, 요강의 주술적 의미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④ 이사갈 때 대문 앞에 소금을 뿌리거나 소금자루를 마지막에 가지고 나오고, 이사와서는 맨 먼저 가지고 들어간다. 소금은 부정을 막는 것이므로 대문간에 뿌려서 부정을 막고자 함이다.
소금자루를 맨 뒤에 가지고 나오는 것은 이사 떠나기 전 최후까지 흉액을 막고자 함이다. 또한 이사와서 맨 먼저 들여놓는 것은 새로 이사온 집에 있을지도 모르는 부정을 먼저 가시게 하기 위해서이다.
⑤ 이사갈 때 떡을 해서 농 안에 넣어간다. 이는 풍년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또, 붉은 팥떡을 해감으로써 농에 함께 붙어 올지도 모르는 악귀를 쫓고자 하는 의미도 있다.
⑥ 이사갈 때는 문구멍을 찢어놓고 가거나 방문을 열어놓고 간다. 문구멍을 찢거나 방문을 열어놓고 가는 것은 살던 집의 복이 찢어놓은 문구멍이나 열어놓은 문을 통하여 따라 나와서 함께 가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복이 있어야 잘 산다고 굳게 믿었던 우리 선인들의 사고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⑦ 이사갈 때는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꼭 살려서 가져간다. 우리 선인들은 불을 재산신으로 여겨 불씨가 꺼지면 재산이 메말라 집안이 망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불씨를 아주 중요시하였다.
⑧ 이사갈 때에 장롱 밑에다 붉은 색으로 ‘왕(王)’자를 써붙여 간다. 이렇게 하면 악귀가 따라오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귀신이 가장 무서워한다는 붉은 색을 썼고, ‘王(왕)’자를 쓴 것은 왕권이 가장 큰 권력이므로 귀신도 겁을 먹고 따라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⑨ 이사하는 날, 이사 들어갈 집의 대문 · 마당 · 부엌 · 방 · 곳간 · 변소 · 우물 등에 쌀 · 보리 · 밀 · 콩 · 팥 등을 함께 볶아서 뿌린다.
이사하는 집에 곡식을 볶아 뿌리는 것은 농사가 주업인 농경사회에서 풍년을 비는 뜻에서 생긴 주술적인 행위라고 보인다. 또 붉은 색이므로, 붉은 색은 잡귀를 쫓아내는 주력이 있다고 생각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⑩ 이사하는 집의 방에다 약쑥을 태우거나 이것을 방문이나 대문에 매달기도 한다. 우리 민속에서 쑥이 갖는 의미는 그 비중이 크다.
단군신화에서부터 쑥은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쑥은 독특한 향내가 있으며 약효가 인정되어 약재(藥材)로 쓰일 뿐만 아니라 악귀를 쫓아내는 데 효력이 있는 영초(靈草)로 믿었다.
바가지에 물을 떠서 고추 · 숯 · 소금을 넣고 이사온 집의 부엌 바닥에다 둔다. 이런 사례도 역시 부정을 가시게 하고, 잡귀를 몰아내려는 의도에서 생긴 것이다.
즉, 바가지 · 물 · 고추 · 숯 · 소금의 주력을 이용하여 부엌을 정화하고자 함에서였다. 부엌신은 한 가정의 영속을 관장하는 만큼 대단히 중요시하였으며, 식생활과 직접 관계가 있으므로 그만큼 청결을 요하는 곳이었다.
홍두깨를 이사한 집의 큰방에다 가져다 놓는다. 홍두깨는 밀가루나 쌀가루를 반죽하여 넓게 펴는 데 쓰는 기구이다. 즉, 칼국수나 떡을 할 때 쓰는 기구이다. 이는 인간의 식생활을 담당하는 것이므로 생명을 영위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렇게 하면 풍년이 든다고 생각하였다.
또 커다란 몽둥이 모양의 홍두깨를 보고 악귀가 침입하였다가 겁을 먹고 도망갈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이사갈 때 못 쓰는 물건이나 쓰레기를 그냥 두고 온다. 또 방을 쓸지도 않는다. 이사를 하게 되면 못 쓰는 물건이나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한 집안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해 온 물건들이다.
이것들에는 눈에 안 보이는 복이 서려 있을지도 모르니, 쓸어내면 복을 버리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원시신앙에서 보이는 물신숭배사상(物神崇拜思想)에서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사해 들어갈 때는 맨 처음 어른이 먼저 들어간다. 어른이 먼저 들어가는 것은 가택신(家宅神)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것이다.
또 어른이 먼저 들어감으로써 악귀나 재액을 물리치고, 재액을 당해도 어른이 당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는 어린이를 보호해야겠다는 본능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이사 들어가는 시각은 해가 떠오르는 아침이 좋다. 이는 밝은 햇빛이 온 집안을 환하게 비추어 주는 것과 같이, 집안 형편도 환하게 만사형통하라는 뜻이다. 즉, 밝게 비치는 서광을 가운의 번창에 연관시키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사 들어갈 때는 빈손으로 들어가지 않고 돈이나 곡식, 베 등을 들고 들어간다. 이것은 새로 이사온 집에 재물을 들고 들어감으로써 앞으로 재물이 많이 생기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농가에서는 대개 이렇게 하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이사갈 때는 절대로 찬밥을 가지고 가지 않는다. 부잣집에서야 찬밥을 먹을 리가 없다. 즉, 찬밥이란 가난을 의미하므로 가난의 상징인 찬밥을 새로 이사가는 집에 가지고 가서 가난을 계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사가서는 부자로 살고 싶다는 소망에서 생긴 풍속이다.
이사갈 때는 식초병은 가지고 가지 않는다. 옛날에는 가정에서 술이나 장 · 식혜 등을 만들어 먹었는데 잘못하면 쉬어 못 먹게 되는 수가 있다.
이들이 쉬는 것은 집안이 망할 징조라 하여 크게 금기로 여겼다. 이사갈 때 식초병을 가져가서 신 것을 퍼뜨리면 안 되므로 아예 화근이 되는 것은 없애자는 뜻에서였다.
이사갈 때 비는 가지고 가지 않는다. 비는 물건을 쓸어내는 기구이므로 이사할 집의 복을 쓸어내게 될까 싶어 아예 비를 가지고 가는 것은 삼갔다.
이사갈 때에는 멧돌을 가져 가지 않는다. 멧돌을 가져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곡식을 부수는 기구이므로 곡식의 파괴는 가난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아가 눈에 보이지 않는 복까지 파괴할까 싶어 파괴를 연상해서 갖고 가지 않았다. 그러나 생활도구를 영영 버릴 수는 없으므로, 이사한 뒤 밤중에 살짝 들여다놓기도 하였다.
이사할 때 그릇이나 거울 등을 깨뜨리지 않는다. 우리 선인들은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그에 앞서 그릇이나 거울 등이 깨지는 것을 대단히 불길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즉, 이것은 불행의 징조로 여겼기에 파손이 없도록 매우 조심하였다.
집 뒤로 이사가지 않는다. 집을 물려 앉히지도 않는다. 우리 선인들은 살고 있던 집의 뒤쪽으로 이사하는 것은 가업 번성을 막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뒤로 이사가는 것은 금기로 여겼다.
‘이사 후 풍속’의 사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이사한 뒤에 팥죽을 끓여 집 안의 여러 곳에 뿌린다. 우리 풍속에서 동짓날 팥죽을 끓여 집 안에 뿌리거나, 이사를 한 뒤 팥죽을 뿌리는 일은 모두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서이다.
귀신은 붉은 색을 무서워하므로 붉은 팥의 주력(呪力)을 이용하여 이사간 집에 붙어 있을지도 모르는 악귀를 몰아내고자 함이다. 팥죽의 주력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 문헌인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그 기록이 있다.
② 이사한 뒤 떡을 해서 이웃과 나누어 먹는다. 이사가서 붉은 팥을 고물로 한 시루떡을 해 먹는데, 이는 붉은 팥의 주력으로 잡귀를 ○고자 하는 의도에서이다. 또 농경사회에서 풍년을 비는 행위도 되고, 이사온 사람으로서 동네에 인사를 겸한 인정의 나눔이라 할 수 있다.
③ 이사한 뒤 부적(符籍)을 붙이거나 짚으로 제웅(사람의 형상)을 만들어서 대문에 매단다. 이러한 짓은 나쁜 액운이 닥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나라 정월 보름의 풍속에도 제웅을 만들어 집안의 재액을 떼어 보내는 비방이 있다.
④ 이사간 첫날밤에는 머리를 부엌 쪽으로 향해서 잔다. 이것은 한마디로 재액을 면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잠자는 습관은 대개 머리를 부엌의 반대쪽으로 향하여 잔다.
그런데, 부엌 쪽으로 향하여 자는 것은 그만큼 무지몽매한 인간들이니 가택신들께서 너그럽게 보아 달라는 의미도 있고, 또 부엌 쪽을 향하여 잠으로써 부정을 없애는 행위도 된다고 한다.
⑤ 이사간 뒤에 가택신을 모신다. 우리 선인들은 새집에 입주하였을 때나 이사를 갔을 때는 아무런 화액(禍厄) 없이 복록을 누리며 살고자 가택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또 이를 신앙으로 숭배하였다. 가택신에는 성주신 · 터주신 · 조왕신 · 업신 등이 있다.
성주는 한 가정의 최고 신으로 가내의 재복과 길흉을 주관한다. 터주는 지신을 말하는데, 특히 택지를 담당하는 신을 터주신이라 한다. 터주신은 자기가 관장하는 집 안의 땅을 지키며 잡귀의 침범이나 재앙을 막아 주기도 한다.
조왕신은 부엌신이기도 하고 때로는 아궁이를 관장하는 화신(火神)이기도 하다. 조왕신은 한 가정의 식생할을 담당하는 신이기 때문에 신성하고 깨끗하게 모신다.
업신의 업은 재산신의 한 가지로 구렁이 · 두꺼비 · 족제비 등을 업신으로 여긴다. 대개 농가에서는 이러한 업신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부자가 될 징조라 하여 해치거나 내쫓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업신에 대해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현대인들의 이사풍속에서도 옛날과 변함이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옛사람들의 불씨 존중사상을 이어받아 비록 연탄불이기는 하나 꺼뜨리지 않고 꼭 살려서 옮겨갔다. 이것은 한 가정의 재화에 관계 있는 것이라 하여 철저하게 지켰다.
이사한 집을 방문할 때 사가는 선물도 성냥이나 양초는 예나 다름이 없다. 이것도 불과 관계 있는 것으로 불의 정화성(淨化性)과 신성성, 그리고 재화를 지켜주는 재산신의 의미가 있으며, 모든 일이 불꽃처럼 잘 이루어지기를 빌어 주는 의미도 있다.
그 밖에 현대문명의 발달로 가정생활의 필수품인 비누나 화학세제 · 치약 등을 많이 사가는 것이 두드러진 현상이다. 이것은 새로 이사간 집의 부정을 없앤다는 민간신앙적인 의미도 있다.
또한, 새로 이사한 집이므로 깨끗이 청소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기에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세제를 사가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해석된다.
그 밖에 식기류나 가재도구 · 과자류 등을 사가는 경우도 흔히 있다. 이사를 하고 나면 친척이나 친지들이 모여 ‘집들이’라 하여 간단한 잔치를 베푼다. 그리고 지신(地神)을 밟아 액을 없앤다 하여 한차례 노래도 부르고 춤을 추고 놀기도 한다.
그리고 ‘이사떡’이라 하여 붉은 팥고물을 묻힌 시루떡을 만들어 성주신에게 제사하고 이웃과 나누어 먹기도 하는데, 이는 옛 풍속을 따라 새로 이사온 인사로 이웃과 나누어 먹는 정다운 풍경이라 할 것이다.
이사풍속의 배경사상은 주로 풍수지리사상 · 음양오행사상 · 점복 및 벽사기복(辟邪祈福:잡귀를 물리치고 복을 비는 것)의 민간신앙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풍수지리사상면으로 보면, 예로부터 집터를 정하는 데는 남향으로 햇볕이 잘 들고 뒤로는 산을 등지고 있어 바람을 막아,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곳이어야 좋고, 또 생활용수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 적격이라고 하였다.
이는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원리와 일치하는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풍수지리설에 따라 ‘산 좋고 물 좋고 토질이 좋으며, 햇빛이 잘 들며 음습하지 않은 곳에 집을 지으면 재산이 늘고 자손 대대로 번성할 터’라고 하였다. 주택의 풍수사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풍수사상은 대지에 포함되어 있는 지기(地氣)의 힘에 의해서 인생의 길흉과 복을 점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신앙적인 의도가 있는 것이다.
택지의 선정에는 먼저 지기의 왕성한 내맥(來脈)을 잡아야 하며, 좌향(坐向)과 문의 위치와 방향을 정한 다음에 터를 고르고 집 지을 기초를 닦아야 한다. 이처럼 음양설과 간지(干支)에 맞추어 비로소 양택(陽宅:집터)의 완전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풍수의 이상을 갖춘 곳에 택지를 정하고 집을 지으면 거주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그 자손에 이르기까지 발복(운이 틔어 복이 다가옴)해서 가운이 융창하고 사업이 번성하며, 부귀영화가 그치지 않고 계속해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
그러나 풍수적인 법칙을 무시하여 흉지(凶地)에 집을 지으면, 가운은 쇠퇴하고 자손은 빈곤하거나 몰락하며 재화(災禍)가 그칠 사이가 없는 것으로 믿고 있다.
이러한 풍수적인 관념이 있기 때문에 가옥을 신축할 때에는 풍수를 전문으로 하는 풍수사를 초청하여 위치나 방향을 정하고, 이사할 때에도 택지의 조건과 주인의 사주를 맞추어 보아 결정하는 수도 있다.”
이상의 설명을 보건대, 좋은 집터를 구하거나 길한 집으로 이사하는 데 풍수지리사상이 지배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사를 할 때 음양오행설에 따라 좋지 않다는 것은 미리 피하고, 길하다는 쪽을 택하여 재액을 미리 막고자 하였다.
음양오행설은 음양설과 오행설로 나누어지는데, 음양설이란 우주의 모든 사물은 음과 양으로 나누어지고 생성소멸이 모두 음양의 이치에 따른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인생의 모든 행위가 음양설에 좌우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음양법칙에 따라 행동하면 인생의 길흉화복이나 흥망성쇠를 잘 이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오행설이란 세상의 모든 원소를 다섯 가지, 즉 목(木) · 화(火) · 토(土) · 금(金) · 수(水)의 오행으로 나누어, 이 오행의 상호작용과 운용으로 인생의 길흉화복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결국 음양오행설이라는 것은 음양의 성질과 오행의 이치에 따라 방향 · 일시 · 일진 등 모든 일의 길흉이 결정된다고 보는 사상으로, 관혼상제나 이사 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사를 할 때 점을 쳐보고 이사를 할 것인가의 여부, 또는 일시 · 방향 등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사를 잘못하면 재액이 닥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사하기 전에는 반드시 점복가(占卜家)에게 점을 쳐보아 길한 일시 · 방향 · 길지를 택하였고, 좋지 않다면 이사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사를 할 때는 벽사기복의 민간신앙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래서 이사를 하기 전이나 후에는 반드시 가택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중요한 가택신으로는 성주신 · 터주신 · 조왕신 등이 있으며, 특히 가업의 성쇠와 관계 있는 제신들을 중요시하여 섬겼다.
이사갈 때에는 이들 신들을 모셔가서 이사 후에 아무런 동티 없이 안과태평(安過太平)하기를 빌었다. 이사 후 동티가 나면 가신들을 잘못 모셨거나 악귀가 침범한 것이라 보고 무당을 불러 가신을 달래고 축귀(逐鬼:잡귀를 쫓음)를 하고 근신하였다.
우리 나라 이사풍속의 주류를 이루는 사상은 한마디로 복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곳으로 이사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복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이사하여 잘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 겨레는 예로부터 경작지가 좁은 곳에서 가난하게 살아왔기에, 배불리 먹고 양식 걱정 없이 사는 것이 제일 큰 욕망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사가 풍작이어야 하며, 따라서 생활의 모든 신조가 풍농을 갈망하는 쪽으로 집약되었다. 그러기에 이사 때에도 천신이나 농신에게 풍농을 비는 민간신앙이 두드러지게 많았는데, 이것도 하나의 특징이라 할 것이다.
이사갈 집의 방향에서도 ‘남향 집에 동향 대문’을 제일로 꼽았다. 남향은 음양오행설에서 양기가 가장 충천한 쪽이고, 또 과학적으로 보아도 햇볕이 잘 들어와서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기 때문이다.
동향 대문을 바라게 된 것도 동쪽은 음양오행설에서 양의 방향이므로 풍요다산(豊饒多産)과 다복(多福)이 들어올 것이라고 믿은 데 있다.
부엌의 구조까지도 동쪽을 향하되 밥을 푸는 방향은 집 안쪽으로 향하여 퍼서, 복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유의하였다. 이사갈 때에도 복을 쫓지 않기 위해서 못쓰는 물건조차 함부로 버리지 않고 방을 쓸어내는 것까지도 금기로 여겼다.
이것은 물신숭배사상에서, 작은 물건까지도 정령이 있어 복을 점지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점술가나 풍수사 혹은 무당에게 문의하여 자기의 운수와 이사갈 집의 방향, 지세 · 운세들을 점쳐 보고 길한 날을 택하여 이사를 하였다.
이사한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까지도 부정을 멀리하고 복을 부를 수 있는 선물을 마련하여 행운이 가득하기를 축복하였으니, 철저하게 벽사초복(辟邪招福)을 꾀하였다.
우리의 이사풍속은 복사상에서 비롯하여 풍농을 기원하는 풍속으로 이어지며, 가택신을 숭상하고 풍수사상 · 음양오행사상 · 점복사상에까지 접맥되어 가난의 한이 잘 살아보겠다는 집념으로 변용된 것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