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청거(靑居). 충청남도 천안 출생. 부인 전덕숙 여사와 5남 1녀를 두었다.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이던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 관련되어 퇴학당한 뒤 1933년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39년 와세다(早稻田)대학교 정경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해 졸업한 뒤 곧 바로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1940년 강제로 폐간될 때까지 기자직을 수행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식민지 통치자들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였다.
해방직후 반공 · 우익집단인 한국민주당원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1949년 제헌의원 천안 보궐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그 뒤 2 · 3 · 4대 민의원 선거에 나섰으나 낙선되었다. 1960년 7월 29일 시행된 제5대 민의원 선거에서 다수당이었던 민주당 후보로 천안에서 당선되었다.
1960년 선거 직후 장면(張勉) 총리가 민주당 신파의 자파 중심적 정국 운영에 반발해 민주당 구파는 집권당을 분당시켜 야당인 신민당을 별도로 창당하였고, 이듬해에는 신민당 선전부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民政黨) 후보로 천안 · 천원에서 당선되었다. 그 뒤 1966년 민중당 충남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68년 신민당 정무위원을 지냈다.
1973년 신민당을 탈당해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하다가 1978년 탈당하여 재야에서 반유신체제운동을 하였고, 1987년 평화민주당 고문의 자격으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제헌동지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반공과 반독재의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60년 잠시 동안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야당에 몸담고 정치역정을 걸었다. 1950년대 이승만(李承晩) 독재와 싸움을 시작한 이래로, 1960년대부터는 역대 군사독재 정권과도 타협을 하지 않았다.
언론인 출신의 정당인답게 다수의 논설과 정치평론을 여러 언론매체에 발표하였는데 다음 그의 저서에 모아져 있다. 그의 저서로는 ≪반공 · 반독재 · 반부패 투쟁20년≫ · ≪회상반세기 -투쟁20년-≫ · ≪정치와 윤리≫ 등이 있다. 위와 같은 언론활동과 야당에서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 등 그가 국가에 공헌한 업적이 인정되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