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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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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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및 그 동맹국들 사이에 전개된 제한적인 대결상태. 콜드워 · Cold War.
이칭
이칭
콜드워, Cold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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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및 그 동맹국들 사이에 전개된 제한적인 대결상태. 콜드워 · Cold War.
개설

냉전이라는 말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 및 그 동맹국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전개된 제한적 대결상태였다. 그 당시는 사상적인 이념(이데올로기)대립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세계를 반분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중·소분쟁(1950년대 중반에 싹트고 1960년대 초·중반에 절정에 이름)으로 세계 제2의 사회주의 국가 중국이 소련으로부터 독자적인 노선을 선언하여 비동맹운동에 나서게 되고, 연이은 미·중 국교 정상화 협상(1969∼1979)과 미·소간의 제한적인 화해 무드 조성(데탕트; 1972년 미국과 소련간의 SALT[전략 핵무기 제한 협정] I 체결), 유럽통합논의 시작, 제3세계 등장, 경제대국 일본의 부상 등으로 양극화된 국제질서가 다극체제로 전환되면서 양극적 냉전체제는 점차 완화되었다. 급기야 1980년대 중반 고르바쵸프가 등장한 이래 소련이 분해되고 사회주의 블럭이 붕괴되면서 1990년대에는 바야흐로 “냉전후시대(the post Cold War era)” 또는 “탈냉전시대”라고 지칭되는 새로운 세계 질서가 수립되었으므로 냉전체제는 종언을 고했다.

내용

냉전(the Cold War)이라는 말은 전통적 열전(熱戰, hot war) · 실전(實戰, shooting war)과 대비되는 용어로서 “무력에 의하지 않고 외교·선전에 의하여 신경전(war of nerves)을 펼치는 상태”를 지칭한다. 또한 ‘해빙’과도 대비되는 용어이다.

14세기 스페인 작가 돈 후안 마뉴엘(Don Juan Manuel, 1282∼1348)이 스페인 기독교인과 회교도들 간의 끝없는 투쟁을 지칭하는 용어로 처음 사용했다. 그 후 20세기에는 의미가 변용되었다. 1946년 뉴욕 센트랄 파크에서 어떤 방랑자가 별 뜻 없이 내던진 말에서 착상한 버나드 바루크(Bernard Baruch; 미국의 은행가·외교관·대통령 고문)는 1947년 4월 유엔 원자력 위원회의 미국대표로서 국제원자력 개발기구의 창설을 제안하면서 현재의 의미로 사용했다. 그 후 미국의 비판적 언론인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이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에 연재된 자신의 논문을 출간하면서 제목으로 사용, 사회과학적 용어로 개념화·일반화했다.

실제 냉전은 “강대국간의 선전과 침투, 간접적인 경제적 군사적 압력에 의한 극심한 적대관계”를 지칭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냉전은 볼셰비키 혁명과 제2차세계대전으로 시작된 ‘세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간의 전쟁도 평화도 아닌 근원적 대치상태(underlying rivalry)’를 지칭하는 말로써 ‘대결과 견제’가 주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대치상태는 미·소간의 상호견제가 시작되었던 시점에서부터 기원적으로 뿌리내렸다.

냉전의 발생요인에 대해서는 여러 다양한 학설이 있다. 현실주의자들은 냉전이 비록 이데올로기전쟁으로 표출되었으나 이는 표피적인 현상일 뿐이며, 본질적으로는 강대국 간의 세력 갈등(power struggle)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므로 전통적인 세력균형이론에 의하여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하여 자유주의자들은 정책상의 오류, 기회의 상실 및 상호간의 오해(misunderstanding)때문에 냉전이 발생했다고 해명한다.

한편 미국과 러시아 쌍방에 비판적인 좌파 이론가들은 냉전이 미소 사회 내부의 정치적 경제적 필요에 의하여 발생하였다고 주장한다. 특히 정치·군사적인 군비경쟁이 냉전체제의 발생과 지속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미·소 모두는 냉전이라는 경쟁에서 이익을 얻고, 그것을 이용함으로써 이체동형(異體同形)의 양 체제에 서로 비슷한 가면을 씌웠다고 해석한다. 즉 미소간의 끊임없는 군비경쟁에서 이익을 얻고자 하는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가 냉전을 이끌었으며, 이의 지속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에 비판적인 좌파 이론가들은 “냉전이 왜 시작되었는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미국의 제국주의가 발생했는가”로 환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냉전은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미국의 야망 때문에 발생했다고 해석한다.

냉전의 원인을 살펴보는 서로 다른 가설의 주창자들은 냉전의 기원 문제에 관련해서도 각기 다른 입장에 서 있다. 대개 현실주의와 자유주의자들은 전통주의와 상대적으로 친화력을 가지고 있으며, 좌파이론가들은 수정주의와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좌파이론가 중 미국에 비판적인 이들은 수정주의 쪽에, 미국과 러시아 모두에 비판적인 이들은 (수정주의에 편향된 경우도 있으나) 대개 후기수정주의로 분류된다.

한국의 경우 광복 이후 3년의 기간 중에는 일제 식민지배에서 갓 벗어나 정치적 미래에 대한 다양한 구상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정치운동이 각축을 벌이며 국내정치가 소용돌이치듯 전개되었다. 이러한 국내적 정치동향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대립이 점차 가시화되어 가던 국제정치적 환경으로부터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의 전시협력을 기초로 전후세계질서 수립에 있어서도 협력적 관계를 유지할 것을 희망했으나, 이러한 희망은 점차 상대방에 대한 의심과 불신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반도에 대해서도 당초 미소협력을 전제로 한 신탁통치안이 구상되었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 회의가 1946년과 1947년 2차례에 걸쳐 열렸다. 그러나 냉전적 대립이 점차 본격화되면서 미국과 소련은 상대방의 한반도에서의 배타적 지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게 되었다.

미·소의 이러한 자세변화는 국내적 차원의 정치적 좌우대립과 맞물리며 한반도에는 결국 통일정부가 아닌 남북한 각각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세계냉전의 대립구도에 조응하는 한반도 냉전의 정치적 구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결국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하여 냉전의 최첨단이 되었다. 이후 세계적 차원의 화해 분위기 속에서 1970년대 이래 남북대화가 단속적으로 있어왔으나,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은 크게 완화되지 못했다. 1980년대 말 이후 세계적 차원의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 2000년대에 들어와 남북정상회담이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 있었으나,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으므로 국지적 냉전의 유산은 2010년 현재 아직 잔존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는 냉전이 이 지구상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유일한 섬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 냉전은 정치·경제·선전의 영역에서 벌어졌고 무기가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지만, 두 초강대국 사이의 직접적인 무력대결로 악화된 경우는 없었는데, 핵전쟁의 결과를 서로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다만 6·25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은 직접 대결하면서도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은 대결을 회피하면서 배후조종하는데 그쳤는데 역시 지역과 무기, 전쟁목표가 제한된 제한전이었다. 따라서 냉전기간 세계 최강국 미·소간의 열전은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그 체제가 안정적이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달성된 냉전체제 해체는 미국이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였다. 즉 미국이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패배가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공동승리라고 변명했다.

참고문헌

『독립에서 냉전까지: 미국 외교정책이 걸어온 길』(이승곤, 기파랑, 2007)
『냉전의 역사, 1945·1991』(김진웅, 비봉출판사, 1999)
『탈냉전기의 국제정치와 한반도 통일』(안병준, 법문사, 1993)
『냉전과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박재규, 박영사, 1980)
『냉전사』(박웅진, 박영사, 1979)
집필자
이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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