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표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홍문관교리, 대사간, 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운원(運元)
남록(南麓)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04년(숙종 30)
사망 연도
미상
본관
경주(慶州)
주요 관직
이조정랑|홍문관교리|대사간|성균관대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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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홍문관교리, 대사간, 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운원(運元), 호는 남록(南麓). 이경억(李慶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서 이인엽(李寅燁)이다. 아버지는 이하곤(李夏坤)이며, 어머니는 송상기(宋相琦)의 딸이다. 아버지가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학문으로 이름 있던 인물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평판이 자자하였으며, 1729년(영조 5) 25세에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였고, 1733년 29세에 알성문과에도 장원급제하였다. 6품직에 바로 올라 성균관전적이 된 이래,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 양사의 관직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다.

입이 무거워 한때 재주를 의심받기도 하였으나, 1735년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8가지 조목으로 나누어 시폐(時弊)를 직서하였으며 그 과정에 영의정 김흥경(金興慶)도 논척되었다.

이로 인하여 영조는 직서하는 자를 우대한다 하여 함열현감에 임명하고 말을 내어주는 특혜를 베풀었으나 실제로는 좌천이었다. 이 상소로 인하여 영의정이 귀향하여 버리고 대사헌·대사간이 갈리는 등 조정에 파문을 일으켰다.

결국 좌의정 김재로(金在魯), 우의정 송인명(宋寅明) 등의 변호로 다시 내직에 보임되었으나 강직한 기개를 굽히지 않았고, 이조정랑·홍문관교리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쳐 대사간에 올랐다.

학문이 뛰어나서 성균관대사성·홍문관부제학 등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고 전라도관찰사를 끝으로 일생을 마쳤다. 시문집으로 『잡저문고(雜著文藁)』 6책이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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