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저(公著), 호는 파곡(坡谷). 세종의 아들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의 현손이며, 강양군(江陽君) 이숙(李潚)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집(李輯)이고, 아버지는 금천부수(錦川副守) 이감(李瑊)이며, 어머니는 감찰 김윤장(金允章)의 딸이다. 이중호(李仲虎)·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 승사랑(承仕郞)으로서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71년 검열·주서를 거쳐 1573년 사복시주부·부수찬·정언, 호조·예조·병조의 좌랑, 홍문관수찬, 이조좌랑에 지제교를 겸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하였다.
1575년 동서분당이 되자 동인으로 지목되어 한산군수로 전임되었다. 1581년 의정부검상·사인, 1583년 홍문관응교·전한을 거쳐 이듬 해 직제학·동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였다. 1585년 좌승지, 이듬 해 대사간, 1587년 홍문관부제학에 경연참찬관을 지냈다.
1589년 대신들의 추천으로 이조참판이 되고 이듬 해 옥당(玉堂: 홍문관의 다른 이름)·대사헌·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1591년 옥당 장관으로 시폐 12조와 세자 책봉을 거론하였다. 다시 상소하려다가 충청감사로 전임되고, 같은 해 8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파직되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어사가 되어 임금을 호종해 평양에 이르러 호조판서가 되고, 선조의 요동(遼東) 피난을 반대하였다. 7월에는 중국 구련성(九連城)에 파견되어 명나라의 원병을 청했고, 원병이 오자 이여송(李如松) 군대의 식량 조달을 위해 진력하다가 1593년 7월 함창에서 과로로 병사하였다. 뒤에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완창부원군(完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저서로는 『파곡유고(坡谷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