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유(聖兪), 호는 죽창(竹窓)·삼송(三松).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의 6대손이며, 양주목사 이기(李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이정현(李廷顯)이다. 아버지는 찰방(察訪) 이빈(李賓)이며, 어머니는 목사 이응기(李應掑)의 딸이다.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년(인조 1) 사축서 별제가 되었다. 이듬해 직장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같은 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어 종묘서직장을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1635년 병조좌랑·사간원정언·사헌부장령·세자시강원필선 등과 장악원정·사복시정·봉상시정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에 들어갔다가, 강화가 함락되자 사복시주부 송시영(宋時榮)이 먼저 자결하였다. 묘 둘을 파서 송시영을 매장하고 하나는 비워놓아, 노복에게 자기를 그곳에 매장하도록 부탁한 다음 활끈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특히, 아들에게 전하라는 편지의 글 중에는 ‘살신성인부앙무작(殺身成仁俯仰無怍)’이라는 말이 보인다.
어려서 총명이 뛰어나 10세에 조호익(曺好益)에게 배웠으며, 뒤에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와 회덕의 숭현사(崇賢祠)의 별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