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경칙(景則), 호는 석탄(石灘). 부정(副正) 이익희(李益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간(李侃)이다. 아버지는 형조판서 이원손(李元孫)이며, 어머니는 정종(定宗)의 현손이다. 민순(閔純)의 문인이며 김장생(金長生)과도 친교가 있었다.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형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582년(선조 15) 학행으로 천거되어 예빈시봉사가 되었고, 이어 참봉·종묘서봉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군 300명을 거느리고 적과 싸운 공으로 사옹원직장에 올랐으며, 이어 사재감주부·공조좌랑·고부군수 등을 지냈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에는 직산현감으로 천안군수 정호인(鄭好仁)과 함께 8,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사(兵使)에게 가 합세하였다. 1604년 괴산군수를 거쳐 광주목사(廣州牧使)·남원부사·홍주목사·해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이항복(李恒福)·정홍익(鄭弘翼)·김덕함(金德諴)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광해군의 폭정에 대해 극간하다가 유배되자, 이신의도 분연히 항소를 올렸다가 이듬 해 회령으로 유배, 위리안치되었다. 그 해 가을 북로(北虜)의 경보(警報)가 있어 변경 일대가 불안하자 흥양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풀려 나와 형조참의·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하고, 1626년 판결사를 거쳐 이듬 해 형조참판에 올랐다. 이 해 정묘호란으로 왕을 호종해 강화로 가던 도중 병이 나 인천에 머물다가 수원 마정리(馬井里)에서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과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 『석탄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