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경용(景容), 호는 호거(壺居). 이길보(李吉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성원(李性源)이다.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이낙수(李洛秀)이며, 어머니는 서유후(徐有後)의 딸이다. 규장각대교 이곤수(李崑秀)에게 입양되었다.
1810년(순조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813년 강릉참봉에 제수되었다가 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를 지냈다. 이 해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에 보직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이듬해 대사성을 거쳐 1826년 병조참의, 1835년(헌종 1) 대사헌이 되고, 그 뒤 이조·병조·형조·공조·호조의 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1841년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848년 형조판서에 이어 좌참찬으로 『삼조보감(三朝寶鑑)』의 찬집당상(纂輯堂上)을 겸하고, 이어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 뒤 청녕군(淸寧君)에 봉해지고 공조·이조의 판서, 판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헌종이 죽자 왕의 시장제술관(諡狀製述官)이 되고, 1852년(철종 3) 이후 예조·공조·형조의 판서가 되었다.
이 후 지중추부사 겸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약우는 위로 삼조(三朝: 순조·헌종·철종)의 권우(眷遇)를 입었고, 아래로 사류(士類)의 추앙을 받아 청요직을 두루 편력하였다. 문장에 뛰어나 이약우의 상소문은 명문으로 유명하였으며, 문사(文詞)는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고, 역학·산수에도 정통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시문집으로 『문강공유고(文簡公遺槁)』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