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심(季心). 이양휴(李揚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시만(李時萬)이다. 아버지는 이백린(李伯麟)이며, 어머니는 심지한(沈之漢)의 딸이다.
1678년(숙종 4)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로 있으면서 이듬해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 때 사간원정언으로 남인들의 공격에 앞장서서 윤휴(尹鑴)·오정위(吳挺緯)·허견(許堅) 등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경상도 암행어사로 민정을 살폈으며, 사헌부지평·홍문관수찬·교리 등 청요직(淸要職: 학식과 문벌이 높은 인물에게 주는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쳤다.
1682년 통신사를 파견할 때 정사 윤지완(尹趾完)과 함께 부사로서 일본에 다녀왔다. 1685년에는 별차경관(別差京官)으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민정을 살폈고, 이듬해 승지에 발탁되었다. 1688년 충청감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사간 김주(金澍)와 정언 김몽양(金夢陽)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귀양갔다.
5년 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도승지로 기용되고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96년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곡식을 옮겨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청했으며, 형조판서를 거쳐 동지사(冬至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01년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장희재(張希載) 처의 공초(供招: 신문한 조서) 및 윤순명(尹順命)의 공초 속에 이름이 거론되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동지의금부사 김연(金演)의 변호로 무고가 밝혀져 재등용되어, 한성판윤을 거쳐 1710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지난날 무고를 당했던 일을 거울삼아 스스로 경계하며 옥송(獄訟)을 잘 처리해 칭송이 자자했다 한다. 관직은 좌참찬에 이르렀다.
기지가 있고 영리했으며, 문장에도 능하였다. 다만, 여러 차례 과거 시험을 관장하면서 부정을 행하고 청탁도 받아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