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옥오(玉吾), 호는 운당(雲塘). 이암(李嵓)의 후손이다. 조식(曺植)의 문하생이며, 평소에 최영경(崔永慶)·하항(河沆)·유종지(柳宗智) 등 동인들과 친교를 맺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도량이 커서, 『소학』과 사서를 힘써 공부하여 유학에 정통하였다. 특히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몸소 실천하여 체득하려 노력하였으며, 실제로 효우(孝友)가 지극하여 부모를 섬김과 형제를 사랑하는 데 도(道)를 다하였다.
1550년(명종 5)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를 중흥시켜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부활하고 승려 보우(普雨)를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에 임명하자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18세 때에는 삼각산에 들어가 독서를 하는 중에 문정왕후가 그 사찰에 100필(疋)의 금단(錦緞)을 내려 기복을 하였는데, 이염이 그 비단을 모두 불태워 왕후의 노여움을 사 극형에 처하게 되었으나, 명종의 두둔을 받고 형을 면하게 된 일이 있었다.
그 뒤에도 학문에 노력하였으나 1588년 신병으로 죽었다. 유학의 선비로서 불교중흥을 배척한 용감한 선비로 인정받았으며, 진주의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