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필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호조참판, 형조판서,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교백(喬伯)
  • 이칭상악(商岳)
  • 창계(蒼溪)
인물/전통 인물
  • 본관전주
  • 사망 연도1808년(순조 8)
  • 성별남성
  • 주요 관직호조참판|형조판서|함경도관찰사
  • 출생 연도1738년(영조 14)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우인수 (경북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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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호조참판, 형조판서,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상악(李商岳). 자는 교백(喬伯), 호는 창계(蒼溪).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 이여(廣平大君 李璵)의 후손이며, 이유(李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현숭(李顯崇)이다. 아버지는 대사간 이존중(李存中)이며, 어머니는 홍중복(洪重福)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성품이 강직해 언행에 다소 과격한 면이 있었다 한다. 1766년(영조 4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정언·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문학·홍문관수찬·응교 등 청요직(淸要職: 학식과 문벌이 높은 인물에게 주던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쳤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성균관대사성에 발탁되었고, 승지를 거쳐 1779년(정조 3) 부제학이 되었다. 이듬해 홍국영(洪國榮)의 사주를 받은 대사헌 이보행(李普行)이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서명응(徐命膺) 형제를 탄핵할 때 여기에 동조하는 소를 올려 부제학에서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기용되어 강계부사 등 지방관을 거쳐 여러 차례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795년 대사헌 때 천주교인의 처벌을 강경하게 고수했으며, 대사간 최헌중(崔獻重)이 천주학 배척에 가탁(假托)해서 왕을 비방한다며 처벌을 주장하다가 도리어 편당(偏黨)으로 몰려 단천으로 귀양갔다.

몇 년 뒤 귀양에서 풀려나 호조참판·형조판서·함경도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고 우참찬에 이르렀다. 1805년(순조 5) 우참찬 때 사포서(司圃署) 일로 좌의정 서매수(徐邁修)를 심한 말로 탄핵했다 하여 순안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다시 귀양에서 풀려나 광주유수를 지냈다.

1807년 7년 전 함경감사 때 귀양간 사람을 임의로 죽였다는 정언 서준보(徐俊輔)의 상소로 죄가 소급 적용되어 유수에서 파직되었다. 정조조에 청백리(淸白吏)에 들었다.

참고문헌

  • - 『영조실록(英祖實錄)』

  • - 『정조실록(正祖實錄)』

  • - 『순조실록(純祖實錄)』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청선고(淸選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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