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만송당(萬松堂). 김덕령(金德齡)의 처남으로서, 담력과 지략이 있어 김덕령과 더불어 의기가 투합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분강개하여 백면서생으로서 김덕령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진해·고성 지방을 방어하여 왜군의 호남 지방 진출을 막았다.
이에 당시의 재상들이 그 충의에 감탄하여 무과에 응시할 것을 권하여, 무과에 합격, 비변사낭청을 거쳐 안악·숙천·정주·벽동 등지의 첨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1607년 경원부사가 되었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킬 때 방어사로서 황해도에 있었다.
이 때 지원병력이 이르기도 전에 적병이 이르자 선봉에서 수백 명을 거느리고 용전분투하여 적병을 물리쳤다. 1627년 정묘호란에서도 북도방어사가 되어 철령을 지키며 적을 크게 물리쳤다. 그러나 김덕령이 모함으로 화를 입은 뒤 눈뜬 장님으로 칭탁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