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일명 경태(敬泰). 1935년 6월 신사참배반대시위사건으로 잡혀 병보석중 국내를 탈출하여, 북경의 화잉전수학교[華英專修學校]를 거쳐 1939년 9월 난징[南京] 국립중앙대학에 진학하였다.
학우인 송지영(宋志英)·조일문(趙一文)·이정선(李正善) 등 10여명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 및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조직하고 회장과 공작대장을 맡아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0년 2월 난징 거주 교포인 정윤관(鄭允官)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각지의 공작대원에게 분배, 전달하였고, 그해 7월 7일 난징에서 일본인 출입 음식점에 시한폭탄을 장치하여 일본인 5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1943년 6월 난징에서 지하공작을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6개월여를 감옥에서 고생하였고, 그해 10월 충칭[重慶]에 가 있는 이정선으로부터 제2지대 3구대 3분대 난징지하공작 특파원의 소속증명과 상위(上尉) 임명장을 받았으며, 1945년 3월 이후 대일 광파(廣播)선전대에서 대일선전공작을 담당하고 있다가 조국광복을 맞았다.
교포재산관리 및 안전귀환에 주력하다가 1946년 3월 귀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