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여담(汝聃). 이의진(李宜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판서 이보혁(李普赫)이다. 아버지는 이중우(李重祐)이며, 어머니는 조적명(趙迪命)의 딸이다.
1759년(영조 35) 통덕랑(通德郞)으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곧 문한관에 임명되어 강필리(姜必履)와 함께 경연(經筵)에 참여하였다. 1763년 암행어사가 되어 충주의 양진창(楊津倉)을 안렴하였으나, 충원현감 신확(申曤)의 불법을 다스리지 못해 파직되었다.
곧 수찬에 기용되어 이후 사서·교리 등을 역임했으나, 옥당(玉堂) 관원들이 왕의 노여움을 사 모두 파면, 치죄될 때 연루되어 갑산부에 일시 유배되었다.
그 뒤 교리(敎理)·헌납(獻納)·부수찬(副修撰)·응교(應敎)·필선 등의 언관 계통의 관리로서 활약을 하다가, 1768년 승지에 발탁되어 3년 동안 왕의 측근으로 있다가 황해감사에 임명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2년 후 승지·대사성·이조참의 등을 번갈아 역임했는데, 1776년 전주(銓注: 관리를 선발해 임금에 천거함.)에 공정하지 않았다는 홍문관의 탄핵으로 의금부에서 추고(推考: 심문해 징계함)당하고 일시 면직되었다. 정조 즉위 후 다시 이조참의·대사성을 거쳐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1778년(정조 2) 경상도감사로 다시 외직에 나갔다.
그 뒤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한성판윤·비변사제조·우참찬 등을 거쳐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대사헌이 되었다. 이 때 사회 풍속을 바로잡기 위한 기강 쇄신 및 전정(田政) 확립을 위해 오랫동안 중단된 양전(量田)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다시 여러 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를 겸직했으나, 1789년 흉언사건(兇言事件)에 연루되어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반역의 죄목으로 처형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