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일명 방(芳)·윤봉조(尹鳳朝). 자는 만위(晩瑋), 호는 춘호(春湖)·한정(漢汀)·법명(法明). 충청남도 당진 출생. 이종백(李鍾百)의 아들로 이현(李賢)에게 입양되었다.
경성법정전수학교(京城法政專修學校)를 졸업하였다. 통훈대부행효덕전참봉(通訓大夫行孝德殿參奉)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때 종로 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같은 해 10월 사유토지[200석 추수분]를 매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금원인 강태동(姜泰東)을 통해 전달하였다.
1921년 5월 사유토지[270석 추수분]를 다시 매각해 대금 전액을 휴대하고 그 해 6월 임경호(林京鎬) 등과 같이 북경으로 가서 이회영(李會榮)에게 헌납하였다.
여기에서 약 1년간 조성환(曺成煥)·김좌진(金佐鎭)·이세영(李世永) 등과 접촉하면서, 김원봉(金元鳳)·유석현(劉錫鉉)·유근(柳瑾) 등 10여 명의 독립지사와 독립운동의 방략을 협의하였다. 1922년 4월 자금조달차 국내에 잠입했다가 서울에서 일본경찰에 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 뒤 다시 사유토지[150석분]를 매각, 강태동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헌납하였다. 1924년 가을 사유토지[230석분]을 매각한 대금을 휴대하고 민효식(閔孝植) 등과 같이 상해에 가서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에게 헌납하였다. 이 때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김창숙(金昌淑)·신익희(申翼熙) 등과 접촉해 군자금 문제를 협의하였다.
1929년에도 잔여 사유재산을 전부 매각해 이시영에게 헌납하였다. 1932∼1945년까지 이시영의 지령 하에 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위장 입국한 뒤 평안북도 구성·삭주 등지에서 광산을 경영하였다.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을 매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면서 광산은 독립운동가의 회합장소로 제공하였다.
1945년 2월 김구의 지령에 따라 국내 밀파 행동대원 60명의 군량 조달의 사명을 받고 이를 주선했으나 비밀이 누설되어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