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건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한인청년당과 의열단 등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임시의정원 충청남도 대의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6년(고종 43)
사망 연도
1960년
출생지
충청남도 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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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한인청년당과 의열단 등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임시의정원 충청남도 대의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일명 동초(東初) 또는 세장(世章). 충청남도 천안 출생. 일찍이 중국 산둥[山東]의 군벌이던 옌시산[閻錫山] 휘하에서 군관학교 과정을 수료하고 독립운동대열에 참가하였다.

1931년 중국 북경(北京)에서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사전 봉쇄하려는 밀정 신모(申某)를 살해, 제거하는 등 독립투쟁의 저해 세력을 없애는 데 주력하였다.

그 뒤 상해(上海)에서 한국인독립운동청년동맹을 조직하고 활동하는 한편, 한인청년당(韓人靑年黨)과 의열단(義烈團) 등의 조직에 가담하여 극렬한 무장항쟁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0월 31일 교민단의경대원(僑民團義警隊員)으로 임명되어 그곳을 내왕하는 출입국자들의 신상을 파악함과 동시에 독립투쟁가들의 부일(附日)매국행위 여부를 조사, 색출하여 제거하는 등 민족정기확립에 기여하였다.

1931년 12월부터 1933년 11월까지 임시의정원 충청남도 대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33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난징[南京]지부의 활동요원으로 지명되었다.

1934년 4월 10일 중국 중앙군관학교(中央軍官學校) 뤄양분교[洛陽分校]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난징에 머무르면서 김구구락부회(金九俱樂部會)를 개최하여 친목도모와 독립운동자간의 유대강화를 꾀하였다.

1936년 봄 화로항(花露港)의 합숙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는 등 항상 새로운 전술전략을 익히는 데 앞장섰다. 1938년에는 우창[武昌]·한커우[漢口]·한양(漢陽) 등지에서 대일무장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중국군의 칭송을 받았다.

1942년 4월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하여 8·15광복 때까지 구국투쟁을 계속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한국광복군』(이현희, 독립기념관, 1990)
『독립유공자공훈록』5(국가보훈처, 1988)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현희, 집문당, 1982)
『독립운동사』6(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5)
『조선통치사료』7·8(김정주, 한국사료연구소, 1971)
『조선독립운동』II(김정명 편, 原書房, 1967)
『국외용의조선인명부(國外容疑朝鮮人名簿)』(조선총독부경찰국)
『고등경찰보(高等警察報)』(경찰국보안과)
「광복군명단(光復軍名單)」
집필자
이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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