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후(子厚), 호는 하서(荷西). 이경직(李景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기영(李起英)이고, 아버지는 이덕성(李德成)이며, 어머니는 홍유구(洪有龜)의 딸이다.
1708년(숙종 34) 사마시에 합격하고 하급 관직을 거쳐, 1722년(경종 2) 신천군수로 재직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정언·헌납·사간 등을 역임하면서 소론으로서 노론을 제거하는 신임사화에 가담하였고, 이어 보덕·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할 때 잠시 승지로 있었으나, 노론파가 집권하면서 삭직, 귀양갔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풀려나왔다. 그 뒤 형조참판·대사성·한성부좌윤·대사간·경기도관찰사·한성부우윤·도승지·대사헌 등을 역임한 뒤 1738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임소에서 죽었다. 그는 서예에 뛰어나 중화의 「삼진충의비(三陣忠義碑)」·「사간박동현표(司諫朴東賢表)」·「금백이덕성갈(錦伯李德成碣)」과 공주의 「목사박병갈(牧使朴炳碣)」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