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백기(伯起), 호는 성재(省齋)·성암(省菴). 이지정(李志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숭진(李嵩鎭)이고, 아버지는 이영(李泳)이며, 어머니는 정만화(鄭萬和)의 딸이다.
1677년(숙종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2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686년에는 전적(典籍)으로서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지평(持平)·정언(正言)·장령(掌令)·헌납(獻納)·수찬(修撰)·부교리(副校理)·집의(執義)·사간·필선(弼善)·승지 등을 역임하고, 1700년에 도승지·동지의금부사를 거쳐 1701년에는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송사(訟事)를 편청(偏聽)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일시 파직되었다.
이듬해 도승지를 거쳐 1703년에는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는데, 국경을 넘어가는 사람 2명을 죽인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705년에 다시 도승지로 서용되었으며 그뒤 동지의금부사·안동부사·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특히 서예에 능하였으며, 그가 쓴 비문으로는 「통도사사리탑비(通度寺舍利塔碑)」, 상주의 「지추김식비(知樞金湜碑)」, 광주(廣州)의 「예판이증비(禮判李增碑)」·「찬성이상의비(贊成李尙毅碑)」, 양주의 「호참목장흠비(戶參睦長欽碑)」·「영백이명웅갈(嶺伯李命雄碣)」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