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신구당(愼懼堂). 충청남도 청양 출신.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김동필(金東弼)·경현수(慶賢洙) 등의 유림들과 함께 궁문 밖에 나가 일본인들의 횡포와 5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1906년 4월 홍주(洪州:지금의 홍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閔宗植) 휘하에서 참모사(參謀士)로 활약하였다. 그 해 5월 홍주성을 공격할 때 의병들에게 정신적 영향을 크게 끼쳤다.
이 전투 중 함께 붙잡힌 80여명과 함께 일본경찰사령부로 압송되었다가 70여명은 곧 석방되고 나머지 8명과 함께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한달 뒤 최익현(崔益鉉)이 임병찬(林炳瓚)과 함께 유배되어오자 최익현을 정신적 지주로 삼아 강론과 시국에 대한 논의, 최익현의 우국시에 대한 답시 등을 남겼다. 최익현의 임종을 보았으며, 국내로의 운구문제 등에 간여하였다.
한편, 옥고를 치르면서도 의거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1910년 국권상실 후 유배지에서 풀려나 고향에서 재거의 기회를 기다리던 중 고종의 밀조를 임병찬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여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조직운동전개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뒤 독립의군부의 간부가 일본경찰에 잡히면서 조직이 드러나 1914년 5월 검거되었다.
1967년 대통령표창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