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 대한제국기
대한제국기 때, 정용기와 함께 산남의진을 결성하여 중군장으로 활동한 의병장.
이칭
  • 한유(韓有)
인물/근현대 인물
  • 본관여흥(驪興, 지금의 경기도 여주)
  • 사망 연도1907년(고종 44)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870년(고종 7)
  • 출생지영일(迎日)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이구용 (강원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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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제국기 때, 정용기와 함께 산남의진을 결성하여 중군장으로 활동한 의병장.

개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한유(韓有). 영일(迎日)출신. 이언적(李彦廸)의 후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주살을 외치며 의병장 정용기(鄭鏞基)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이듬해 4월 동대산(東大山)에서 거의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고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모든 일을 계획, 지도하였다. 이한구의 의병부대는 주왕산·약곡(藥谷)·청하(淸河) 등 각지의 전투에서 선봉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그 뒤 재봉기를 도모한 이한구는 1907년 9월 정용기와 함께 재기하여 청송의 신성(薪城)전투에서 일본군 3명을 사살하고 이어 자양(紫陽)전투에서 일본군 분견소장을 생포, 적군 3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11일 강원도로 북상 도중 영일 입암리(立巖里)전투에서 정용기·손영각·권규섭(權奎燮) 등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 『기려수필(騎驢隨筆)』

  • - 『산남의진사(山南義陣史)』

  • - 『이한구의사행장(李韓久義士行狀)』

  • - 『폭도토벌지(暴徒討伐誌)』

  •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 - 『독립유공자공훈록』1(국가보훈처, 1986)

  • - 『한국독립사』(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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