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성동구, 서쪽은 서대문구, 남쪽은 용산구와 접해 있으며, 북쪽은 청계천을 경계로 종로구와 접해 있다. 위치는 동경 126°57'~127°01', 북위 37°32'~37°34'에 있다. 면적은 9.96㎢이고, 인구는 12만 5733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5개 행정동(74개 법정동)이 있고, 구청은 서울특별시 중구 예관동에 있다.
청계천을 경계로 서울분지의 남쪽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남산은 산정부에서 서울역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호상 흑운모 편마암이 일부 분포하는 것 외에는 구의 전역이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구의 남부는 남산 지역, 북부는 남산에서부터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평탄한 지역이다. 이 평탄한 지형은 기반암이 침식된 침식평탄면으로 건설에 안전한 기반이 될 뿐 아니라 홍수나 산사태 등과 같은 자연재해를 방지한다.
남산은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 서울의 상징으로서 높이는 해발 256m이다. 서울의 내사산인 인왕산(338m), 북악산(342m) 보다는 낮으나 낙산(125m)보다는 높으며 서울시내를 관망할 수 있는 서울타워(236.7m)가 있다. 청계천은 서울시내의 한복판을 흐르며 중구와 종로구의 경계를 흐르는 하천이다. 북악산 · 인왕산 · 남산 사이 분지의 모든 물을 모아 동류하다가, 한양대학교의 동쪽에서 중랑천과 합류하여 한천(漢川)이 되고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한강으로 유입한다.
연평균 기온은 13.3°C, 1월 평균기온은 -1.5°C, 8월 평균기온은 26.1°C, 연 강수량은 1,449.1㎜이다.
서기전 1세기 말엽경 한반도의 중심부인 서울 지방에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였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 세력에서 분파하여 남쪽으로 이주해 온 온조 · 비류 집단은 한강 이남의 마한 50여 개국을 통합하여 백제국을 건설하는 주체가 되었다. 온조 집단은 한강 유역에 위례성(慰禮城)을 쌓고 성읍국가(城邑國家)로서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위례성은 다산 정약용에 의하여 한강 이북임이 논증되었다. 5세기 말엽(475년) 고구려의 백제 도성 함락과 백제의 웅진(熊津, 현 공주) 천도로 한강 유역의 중요지대는 고구려로 넘어가게 되었다.
고구려는 새로운 개척지인 서울 지역에 북한산군을 설치하여 남평양이라 불렀다. 7세기 중엽 한강 유역을 두고 삼국 간에 공방이 치열하였으나, 660년(무열왕 7)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되고, 668년(문무왕 8) 고구려도 나당군에 의해 멸망되자, 신라는 통일지역에 9주 5소경제를 실시함으로써 지금의 서울 지방은 한산주(광주)에 편입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한산주는 한주로 개칭되었고, 당시 서울 지방은 한양군으로 개칭되어 그동안 북한산주에서 한성 등으로 호칭되던 것이 한양군으로 개칭되어 한주에 예속되었다. 북한산성과 한성이 고구려 당시에는 남별도로서 주요 군사기지였으나, 통일신라 이후 정치 · 경제 · 군사적 면에서 그 중요도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 후 한양군은 신라 말까지 한주의 예속 군으로 지속되었으며, 고려왕조를 창건한 940년(태조 23) 양주(楊州)로 개칭되기까지 그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고려시대에 중구 지역을 포함한 서울 지방은 대체로 국초에서 정종 때까지는 양주(楊州),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漢陽)으로 불리었다. 서울 지방은 숙종 때에 이르러 남경으로 승격되어 근기지방(近畿地方)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남경의 규모는 동서로는 대봉(大峰) 즉 오늘날 낙산(駱山)에서부터 지봉(岐峰) 즉 안산(鞍山)에 이르고 있으며, 남북으로는 사리(沙里), 즉 용산 한강변에서 북악산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이렇게 볼 때 중구 지역은 남경의 중심지였으며, 당시 남경의 크기는 지금의 서울 도심지역을 합한 것만큼의 큰 규모였다. 1308년(충렬왕 34)에 즉위한 충선왕은 중앙과 지방의 관제를 개편하면서 남경을 한양부로 개편함과 동시에 부윤(府尹) · 판관(判官) · 사록(司錄)의 관제를 마련하였다. 다른 부와 마찬가지로 왕의 순주와 어의안치(御衣安置) 등은 한양부에서 사라지고 개경과 가깝기 때문에 국왕의 유행(遊幸)과 사냥터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공민왕은 배원사상(排元思想)에 의거한 관제의 환원정책과 천도(遷都)계획을 세웠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우왕은 왕 8년에 잠시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의 천도결의도 무산되어 한양은 또다시 지방행정 단위의 위치로 돌아갔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1394년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함으로써 도읍지가 옮겨졌으며, 다음 해 한양부를 한성부로 개칭하여, 이후 한성부는 1910년 10월 1일 경성부로 개칭될 때까지 518년 간 조선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1395년 9월 종묘와 경복궁이 이루어지고 12월에 왕이 경복궁에 입어하게 되어 신도의 면모를 차츰 갖추게 되었다. 또한 관아 · 시가 · 도성 · 궁성 등의 건설이 차례로 이루어졌다. 다음해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동 · 서 · 남 · 북 · 중의 5부 52방으로 구획하고, 도성과 문루를 완성하여 한성부는 일국의 수도로서 내용과 외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 오늘날의 중구 지역은 한성부 5부 가운데 남부 전역과 서부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였다.
조선 초기의 한성부 관할행정구역은 도성으로부터 사방 10리까지로 정하였는데, 동쪽으로는 양주 송계원(松溪院)과 대현(大峴), 서쪽으로는 양화도(楊花渡), 덕수원(德水院), 남쪽으로는 한강과 노도(露渡)까지 이르는 지역으로 하였다. 1396년에는 백악산 · 낙산 · 목멱산 · 인왕산을 연결하는 약 18㎞의 도성을 쌓았으며, 도성 내외를 통과할 수 있는 4대문과 4소문을 건설하였다. 중구 지역은 도성안의 남쪽 일대를 점하고 있어 왕실 · 고관의 저택과 신사 · 궁묘 등이 산재하였다. 목멱신사(木覓神祠), 국사당(國師堂)은 남산 정상에, 저경궁(儲慶宮)은 남대문로 3가에, 인현왕후(仁顯王后) 생가는 순화동에, 풍운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노인정은 남산 북쪽 기슭에 있었다.
1880년(고종 17) 최초의 외국공관인 일본공사관이 서대문 밖에 설치되었다. 임오군란(1882년), 갑신정변(1884년) 등으로 일본과 청나라의 침탈이 더욱 거세지면서 한성조약 체결 후인 1885년을 계기로 중구 지역 일대에 각 구미인들의 입경과 거류가 시작되었다. 1897년 10월 12일에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지만, 일제의 조선침략을 막을 수가 없었다. 1910년 10월 1일 칙령 제357호와 부령 제7호에 의해 경기도 관할이 되면서 경성부로 바뀌어 경성부 관할 아래 있었으며, 1943년 6월 10일 부령 제163호로 구(區)제도를 실시하여 도성 안을 종로구와 중구로 나누었다. 일제는 중구 남대문로와 을지로에 경제 침탈 기구인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세우고 서울의 금융지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단초를 마련하였다. 이들 금융기관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대기업체와 백화점도 동시에 입지하게 되었다. 중구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활동으로 강우교(姜宇奎)가 1919년 9월 2일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한 사이토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가 1926년 7월 동양척식회사를 폭파하기로 의논하고 권총과 폭탄을 입수하여 동년 12월 28일 먼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고 다시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1개를 던졌으나 불발된 동양척식회사 투탄사건이 있다.
1946년 8월 14일 서울특별시헌장을 미군정 정보부가 특별 발표하고 동년 9월 18일 법령 제106호로 「서울특별시의 설치」를 발표하였다. 9월 28일 서울특별시가 정식으로 탄생되고 서울시는 종로구 · 중구 · 마포구 · 서대문구 · 동대문구 · 용산구 · 영등포구의 8개 구로 구획되었다. 수도 서울의 관문 서울역을 비롯하여 한국은행, 저축은행, 식산은행, 동화백화점, 경성전기를 비롯한 각 기관의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되었다. 충무로 일대의 번화가와 명동 부근의 번성으로 수도 서울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의 중심지대가 된 중구는 인구의 밀도나 경제면 그리고 완비된 문화시설 등으로도 중심 도심지대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중구 관내의 건물 78%가 파괴되었고, 1953년 3월 말 기준 난민총수는 9237가구에 4만 894명에 달하였다. 부산에 피난해 있던 서울시청이 복귀하여 정상적인 행정체제를 갖추게 된 것은 1952년 초부터의 일이었다. 도심부 재건의 중앙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제1지구는 상업지역으로서 지리적, 역사적 특성을 증진시키고, 제2지구는 상업 및 주거지역으로서 복지 증진을 목적으로 1965년 시행되었다.
중구청은 한국전쟁 후 종로3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대규모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여 현대 · 아세아 · 청계 · 대림 · 삼풍 · 풍전 · 신성 · 진양의 8개 건물과 이 건물을 연결하는 공중회랑도로를 각 건물 3층 양쪽에 설치하고 청계천로 · 을지로 · 마른내길 위에는 육교형식으로 연결하였다. 종로청계천 구간에 들어선 현대상가는 1966년 9월 8일 착공되었고, 청계천을지로 구간은 10월 25일에 기공되어 세운상가로 불렀다. 1963년에 동아백화점을 인수한 삼성그룹이 신세계백화점으로 이름을 바꾼 뒤부터 직영체제로 전환하여 1970년대 초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대농그룹이 인수한 미도파백화점도 1973년에 건물을 개수하고 직영체제로 바꾸게 되자 서울의 중심상권은 충무로 · 명동으로 다시 옮겨갔다.
1975년 10월 1일부터 중구 구역이 크게 확장되었으며, 이때의 행정구역 확장으로 중구의 면적은 6.34㎢에서 9.99㎢로 58% 정도 넓어졌다. 1981년 12월 31일까지를 유효기간으로 하는 임시법인 「주택개량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되어 불량 무허가 건물 집단지구의 재개발을 촉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76년 도시계획법에서 재개발조항을 삭제하고 도시재개발법을 단일법으로 제정하여 보다 적극적이고 계획적인 재개발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조치가 마련되었다. 당시 도심재개발사업의 초점은 화교들의 집단거주지역인 소공동의 재개발이었으며, 1973년 건설부고시에 의해 서울시내 10개 재개발지구가 ‘개발촉진지구’로 지정되고 1973년 12월 소공지구에 대형 호텔건물의 기공식이 거행되면서 본격적인 도심재개발사업이 시작되었다.
남대문은 조선시대 한성 도성의 정문으로 4대문 가운데 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1398년(태조 7) 처음 건립된 후 1448년(세종 30)에 재건했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남대문은 피해를 입지 않았고, 1962년 문화재보호법(현, 국가유산기본법)에 의하여 보물에서 국보가 되었다. 건물의 평면은 아래 위층이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의 윗면인 중앙 칸만이 우물마루일 뿐 다른 칸은 흙바닥으로 되어 있고 위층은 널마루이다. 현존하는 성문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전형적인 다포(多包)양식의 건물로 견실한 목조건축물의 수법을 보이고 있어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 중요한 건물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중구 지역의 사적으로 정동에는 덕수궁(사적, 1963년 지정),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사적, 1977년 지정), 서울 정동교회(사적, 1977년 지정)가 있다. 그리고 광희동에는 광희문(사적, 1963년 지정), 남대문로에는 서울 한국은행 본관(사적, 1981년 지정), 명동에는 명동성당(사적, 1977년 지정), 봉래동에는 구 서울역사(사적, 1981년 지정), 중림동에는 약현성당(사적, 1977년 지정), 소공동에는 환구단(사적, 1967년 지정) 등이 있다.
서울특별시 기념물로는 예장동에 목멱산 봉수대 터(서울특별시 기념물, 1993년 지정), 만리동에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서울특별시 기념물, 1982년 지정), 배재학당 동관(서울특별시 기념물, 2001년 지정) 등이 있다.
민속문화유산으로는 필동 남산골한옥마을에는 19세기 후반 가옥으로 삼청동 오위장 김영춘 가옥, 관훈동 민씨 가옥,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이 있다. 삼청동 오위장 김영춘 가옥, 관훈동 민씨 가옥,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은 1977년 3월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은 1977년 9월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예장동에는 와룡묘(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1974년 지정), 장충동에는 관성묘(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1974년 지정) 등이 있다.
유형문화유산으로 장충동에는 장충단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69년 지정), 수표교(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가 있다. 장충단비는 을미사변 때 왕과 나라를 위해 죽은 홍계훈(洪啓勳), 이경호(李璟鎬), 이종구(李鍾九), 이경직(李耕稙) 등 여러 신하들과 임오군란 · 갑신정변 때 죽은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민영환(閔泳煥)이 비문을 지어 세웠다. 방산동에는 성제묘(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필동에는 경희궁 숭정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 정동에는 미국공사관(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2001년 지정), 성공회 서울성당(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78년 지정)이 있고, 충무로에는 옛 제일은행 본점(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89년 지정)이 있다.
중구에는 1895년에 문을 연 관립소학교(官立小學校, 현 광희초등학교)와 정동소학교(貞洞小學校), 유동소학교(紬洞小學校), 해동소학교(梅洞小學校)가 있다. 일본인이 많이 거류하던 지역이었던 중구에는 근대교육기관과 학생의 숫자가 서울의 어느 지역보다 많았으나, 1970년부터 시작된 도심재개발사업과 강남 지역의 개발로 인한 인구분산으로 학교와 학생 수가 격감하기 시작하였다.
교육기관으로 2015년 현재 초등학교 12개교, 중학교 8개교, 고등학교 12개교가 있다. 전문대학으로 국립의료원간호전문대 · 서울예술전문대가 있고, 동국대학교와 대학원 10개가 있다. 서울의 중앙에 위치했기 때문에 직업훈련과 관련되는 국악고등학교를 비롯한 공업 · 상업계 고등학교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고등기술학교 과정의 안경고등기술학교 · 정화여자고등기술학교 · 중앙고등기술학교 · 정화미용고등기술학교 · 예림미용고등기술학교와 사회교육시설로서 중부직업소년학교가 있다.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남산도서관, 손기정도서관은 시민들에게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공연장, 문화의집, 전시관, 영화관, 도서관 등을 비롯한 지역문화예술의 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중구문화원이 있다. 구민회관은 문화센터로서의 기능을 가지며 관내 예술인, 학생들의 발표 기회를 제공하고자 대강당을 공연장화하였고 또한 교양강좌실, 소강당, 체력단련실, 스포츠교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결혼식장으로도 활용되어 중구민의 문화활동 요람이 되고 있다. 남산은 일찍이 공원으로 조성되어 서울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명소로서 극장 및 장충단공원 등 문화 · 휴식시설이 많이 모여 있다.
전시장으로는 한국관광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며 각 지역별 홍보관이 있는 관광안내전시장이 있다. 미술관으로는 덕수궁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삼성미술관, 조선일보미술관이 있고, 시집과 소설작품집 1천여 점 등을 전시하고 있는 한국현대문학관이 있다. 궁중유물전시관에서는 조선시대 왕실의 유물 약 2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으로는 동국대학교불교박물관, 종이미술박물관, 화폐금융박물관, 조흥금융박물관, 퀼트박물관, 철도박물관, 한국체육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만리동에 위치한 손기정체육공원은 테니스장, 다목적운동장, 게이트볼장 등 휴양시설과 각종 운동시설을 갖춘 공원이다. 구민회관, 중구청, 종합복지센터, 청소년수련관 등이 있고, 중앙일보문화센터 내에는 체육관련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관운장묘로 방산동 성제묘(聖帝廟), 장충동 관성묘(關聖廟)가 있다. 성제묘는 민간인이 세운 묘당으로 관운장 부부를 추모하는 제사였는데 현재는 동민이 참여하여 동제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마을 토착인들이 참여한다. 관성묘의 제의 목적은 가정의 부유를 기원하는 것으로 개인적 치성의 성격이 짙다. 남산 와룡묘(臥龍廟)는 제갈공명묘(諸葛孔明廟)로 가정의 안녕과 길복 기구를 하고 있다.
중구에는 남창동 쌍회정, 보은단골[報恩緞洞], 홍문동 홍문(紅門), 버티고개, 황학동 영미교(永美橋), 만리동 약주(藥酒), 상정승골[尙洞] 등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많은데, 그 중 버티고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당동 끝과 약수동이 이어진 부근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높은 큰 고개를 버티고개라고 한다. 옛날 이 고개는 길이 좁고 다니는 사람도 없어서 도둑이 많았으므로 모양이 험악하고 마음씨가 곱지 않은 사람을 보면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란 농담을 하였다 한다. 옛날 순라꾼들이 돌면서 ‘번도!’ 하면서 도둑을 쫓았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番峙], 버티, 버터 또는 한자로 부어치(扶於峙)가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한성부의 진산인 삼각산의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형국이므로 그것을 막기 위해 서쪽의 무악과 떡고개를 두어서 어머니가 떡을 가지고 그 애를 달래서 머무르게 하고, 또 남쪽에는 벌아령(伐兒嶺)을 두어서 아이가 나가면 벌을 주겠다고 하여 그 아이를 못 나가도록 막았다는 것으로 그 벌아령이 변하여 버티고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도 한다.
중구의 전체면적은 9.96㎢로 녹지지역이 1%, 상업지역 36%, 주거지역이 63%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의 변두리로 남촌으로 불리기도 하였지만, 청 · 일전쟁 이후 남대문 주변, 명동, 충무로 일대는 일본인 상가가 터를 잡았고, 소공동에는 화교촌이 생겨났다. 1960년대부터 산업형 도시구조로 바뀌면서 새로운 상업시설과 각종 업무기관이 입지하게 되었다. 사회 · 문화 · 산업 · 금융 · 언론 등의 각종 기관과 시장 · 백화점 · 호텔 · 오락시설이 집중되었다. 소공동 · 북창동 · 명동 · 충무로 등의 중심업무지구에는 회사 · 무역상사 · 은행본점 등의 중추관리기능이 고도로 집중되었고, 금융가를 사이에 두고 백화점 · 고급의류점 · 양품점 · 구두점 · 귀금속점 · 오락실 등의 소매업이 위치하고 있다. 시청을 가운데 두고 롯데호텔 · 조선호텔 · 플라자호텔 · 프레지던트호텔 · 코리아나호텔 · 서린호텔 · 뉴서울호텔 · 뉴국제호텔 · 엠파이어호텔 · 뉴타운호텔 등이 있다. 을지로와 충무로를 중심으로 인쇄업체가 밀집되어 있고, 중구에는 언론 · 출판사가 집중되어 있다.
시장은 조선시대부터 남대문 밖 봉래동 · 만리동 일대 칠패시장(七牌市場)에서 채소와 생선을 주로 팔았으며, 수표교 부근에는 연초전, 필동 지역에서는 가죽제품 · 서책, 서소문 밖의 싸전, 남대문 밖의 소금가게, 저동의 모시전 등이 유명하였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시장은 오늘날의 상업지역과도 일치하여 남대문로의 대형 백화점과 남대문시장, 청계천변에 형성된 평화시장을 위시한 동대문의 국제적인 패션몰이 몰려있다.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는 청계천로 · 을지로 · 퇴계로 · 명동길 · 마른내길 · 왕십리길 등이고, 남북으로는 태평로 · 남대문로 · 삼일로 · 돈화문로 · 배오개길 · 훈련원로 · 장충단길 등이다.
중구는 도심지로서 1980년대의 지하철 건설에 중요한 요인이 되어 1호선, 2호선, 3호선, 4호선 등이 개통되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역청량리역을 잇는 1호선, 1984년 5월 22일 성수역에서 성수역을 순환하는 2호선, 1993년 4월 21일 상계역당고개역을 잇는 4호선, 1993년 10월 30일 대화역~지축과 연결되는 3호선이 개통되었다.
남산은 북쪽의 북악산, 서쪽의 인왕산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 중의 하나이다. 높이 265m로 산의 선이 부드러우며 주위의 경관이 아름답고 아늑한 느낌을 주어 많은 시민이 즐겨 찾는 명소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구국투쟁을 벌인 고당기념관, 안중근의사기념관, 유관순기념관과 영락교회기념관이 있다. 상업업무 지역인 중구는 조선시대에 각종 관아가 위치했던 까닭에 이와 관련된 많은 유적이 분포되어 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정치 · 경제 · 문화 등의 기능시설이 이 지역에 집중되어 시장 · 백화점 · 호텔 · 오락시설과 중심 업무시설인 사회 · 문화 · 산업 · 금융 · 언론 등의 각종 기관이 들어서 있다.
민속시장으로 광희시장, 서울남대문시장, 남평화시장, 방산종합시장 등이 있다. 신당동 떡볶이 골목, 황학동 곱창골목이 있고, 무교동 · 다동 먹거리촌은 오랜 전통의 국밥집이 즐비하고 장충동은 족발이 유명하다.
중구는 남산골 전통 축제,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 장충단 추모제향의 전통예술행사와 명동축제와 같은 지역적 특성을 살린 행사를 하고 있다. 남산골 전통 축제는 한옥마을에서 벌어지는 전통민속놀이 경연대회, 외국인을 위한 특별무대로 영문 · 일문으로 번역된 작품 해설집을 제공한다. 장충단 추모제향은 1988년부터 중구청에서 매년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 · 문무열사 등을 위로하기 위한 추모제향이다.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은 금군과 수문장이 왕궁의 경비를 설 때 하는 의식으로 궁성의 개폐의식, 시위의식, 행순의 순서로 재현되고 있다.
동쪽은 남대문로2가, 서쪽은 태평로1가, 남쪽은 남대문로3가, 북창동과 접해있고, 북쪽은 을지로1가와 이웃하여 있다. 조선 태종의 둘째 딸인 경정공주(慶貞公主)의 궁이 있어 ‘작은공주골’, 한자로 ‘소공주동’(小公主洞)으로 부른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3년 중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소공동으로 바뀌었다. 1960년대 이후부터 은행거리라고 불릴 만큼 많은 은행이 들어섰고, 소공지하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조선호텔, 롯데호텔, 롯데백화점과 여행사 등 많은 사무실이 있다.
남대문과 태평로에 걸쳐 있는 북창동은 조선시대 관아인 선혜청(宣惠廳)의 북쪽 창고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6년 중구 북창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0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 의해 소공동의 관할이 되었다. 1970년 이후부터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였으며, 2000년 3월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동쪽은 태평로1가, 서쪽은 순화동, 남쪽은 서소문동, 북쪽은 신문로와 접해 있다. 정동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정릉(貞陵)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동명이다. 1946년 정동이 되었고 1975년 중구에 소속되었다. 1977년 소공동사무소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구한말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 많은 곳으로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학교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한말 정치인과 구미(歐美) 외교관들의 사교장으로 이용되던 손탁호텔, 러시아제국의 공관 등이 있었다. 덕수궁과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인 서울 정동교회가 있고, 서울성공회성당, 영국대사관이 있다.
동쪽은 남산동, 서쪽은 남창동, 남쪽은 용산구 후암동, 북쪽은 남대문로 · 충무로와 접한다. 동 이름은 이 일대에 어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는 데서 붙여졌으며, 회현(會賢), 회동(會洞)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1943년 중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회현동1가 ·2가 ·3가로 바뀌었다. 현재 행정동인 회현동은 법정동인 회현동1~3가 · 남창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남대문로3·4가 일부 지역의 행정도 담당한다. 예로부터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고 할 정도로 술이 유명하여 주점이 많았는데, 특히 남촌인 장동(長洞) 일대가 유명하였다.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북쪽에는 서울과학교육원이 있다. 이 건물은 어린이회관으로 지은 것인데, 어린이공원이 이전해 가자 1974년 소공동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이 옮겨와 사용하였다.
동쪽은 회현동 1가, 서쪽과 남쪽은 남대문로 5가, 북쪽은 남대문로 3·4가에 둘러싸인 지역이다. 선조 때 설치된 선혜청의 창고 남쪽이라고 한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3년 중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남창동이 되었다. 1970년대 말부터 효율적인 토지 이용과 도심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한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전문종합시장으로는 남대문시장, 숭례문상가 등이 있는데 현재에는 각종 의류를 비롯하여 섬유제품 · 농수산물 · 식품 · 일용잡화 및 수입상품 등을 취급하고 있으며, 그 중 주요품목은 상권이 전국에 퍼져 있는 의류이다. 고객은 국내 소매상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 아메리카는 물론 유럽에까지 퍼져 있다. 또한 아동복은 전국 아동복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선혜청(宣惠廳), 허목(許穆)의 집, 홍엽정(紅葉亭) 등이 있다.
충무로 · 을지로 · 남대문로 사이에 있다. 명례방(明禮坊)의 ‘명’자를 딴 것으로, 원래 명례방골이라고 하다가 줄여서 명동이라고 하였다. 1943년 중구의 관할지역이 되었고 1946년 명동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5년 명동1가는 명동사무소의 관할 구역이 되었고, 1970년 주민 감소로 인하여 남산동13가와 초동 관할의 저동1가가 명동사무소의 관할 구역으로 통합되었다. 1985년 예장동의 일부 지역도 명동사무소 관할로 통합되었고, 1998년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장교동, 무교동, 태평로1가, 을지로1·2가, 남대문로1·2가 일부, 삼각동, 수하동, 수표동을 통합하였다. 이 동은 장교동, 무교동, 다동, 태평로 1가, 저동 1가, 을지로1·2가, 충무로1·2가, 남산동13가, 예장동 일부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
서울특별시를 상징하는 번화가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지금의 충무로인 본정(本町)보다 낙후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주택가였으나 일제강점기 충무로가 상업지역으로 발전하면서 인접지역인 이곳도 그 영향을 받아 상가로 변하게 되었다. 중국대사관과 명동성당(사적, 1977년 지정)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상가지역이다. 한국의 금융 중심지이며 첨단 유행문화의 거리이기도 하다. 전국은행협회, YWCA, UNESCO회관, 로얄호텔 등과 다양한 종류의 소비재 상점들이 있다. 또한 종마루[鐘峴]에는 한국 가톨릭의 총본산인 명동성당이 있는데, 유신독재 등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인사들의 각종 집회와 농성, 피신 및 단식 장소로 국내외에 알려져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들어 시위가 잦아 낭만적인 모습을 잃었으나 해마다 명동축제를 개최하는 등 1990년대 후반 들어 옛 모습 되찾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동쪽은 수표동, 서쪽은 수하동, 남쪽은 을지로2가, 북쪽은 청계천로를 사이에 두고 종로구 관철동과 마주하고 있다. 종로구 관철동 47번지와 장교동 9번지 사이에 놓인 청계천 위의 다리인 장교의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 장교정이 되었다. 1946년 장교동이 되었고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명동(明洞) 관할 하에 있다. 1962년 시행된 재개발을 시초로 여러 차례 재개발이 시행되어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시장으로 1989년 형성된 샹제리제상가가 있으며, 공공기관으로 1995년에 설립된 중구문화원이 소재해 있다.
동쪽은 다동, 서쪽은 태평로1가, 남쪽은 을지로1가동, 북쪽은 종로구 서린동과 마주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 부근에 무기의 제조 관리를 맡아 보던 군기시(軍器寺)라는 관청이 있어 모전(毛廛) 다리 부근에 있던 모교동(帽橋洞)과 구별하기 위해서 무교동이라 하였다. 1946년 무교동이 되었으며 1970년 태평로1가 동사무소 관할구역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4대문 안에서 대표적 환락지구의 한 곳으로 술집 · 음식점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골목길이 많아 교통이 불편하였으나 광교에서 세종로까지 큰 길이 뚫리면서 이동이 편해졌다. 1980년대 이후 도심지 재개발지구로 지정되어 대형건물들이 들어섬에 따라 점차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동쪽은 남대문로1가, 서쪽은 무교동, 남쪽은 을지로1가, 북쪽은 종로구 서린동과 마주하고 있다. 조선시대 다도(茶道)를 주관하던 사옹원(司饔院)에 속한 다방(茶房)이 있어 ‘다방골’이라 한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 다옥정(茶屋町)이 되었다가 1946년 정(町)을 동(洞)으로 개편할 때 다동이 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 재개발이 시행되었으며, 북쪽으로 청계천이 흐르고, 비교적 도로정비가 잘 되어 있다. 1970년까지만 하여도 낙지골목으로 유명하였지만 재개발로 흩어졌고 1980년 접어들어 많은 유흥업소가 들어섰다.
저동12가로 이루어져 있다. 저동 1가의 동쪽은 저동2가, 서쪽은 명동12가, 남쪽은 충무로2가, 북쪽은 을지로23가와 접하고, 저동2가의 동쪽은 초동, 서쪽은 저동1가, 남쪽은 충무로23가, 북쪽은 을지로23가와 접한다. 모시를 취급하던 상점인 저포전(苧布廛)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 영락정(永樂町)12정목이 되었는데, 영락이라는 명칭은 영희전과 장악원의 이름에서 연유하였다. 1946년 중구 저동12가가 되었다. 법정동인 저동12가는 행정동인 명동(明洞), 을지로3·4·5가동 관할 하에 있다. 의료 및 종교기관으로 인제대학교부속 백병원과 영락병원 · 영락교회 등이 있고, 주요 기업으로 쌍용그룹이 있다. 이 밖에 1984년 8월에 건립된 고당기념관과 중앙극장 등이 있다.
남산동1·2·3가로 이루어져 있다. 남산동1가의 동쪽은 남산동2가, 남쪽은 회현동1가, 서쪽은 회현동2가, 북쪽은 충무로1가, 남산동2가의 동쪽은 남산동3가, 남쪽은 예장동, 서쪽은 회현동1가 · 남산동1가, 북쪽은 충무로1가, 남산동3가의 동쪽은 주자동 · 예장동, 서쪽은 남산동2가, 남쪽은 예장동, 북쪽은 충무로2가 · 퇴계로와 접해 있다. 남산동은 남산 북쪽 기슭 아래에 있는 마을인 데서 남산골이라 불리던 동명에서 유래되었다.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신설된 중구 남산정13정목이 되었다가 1946년 남산동13가가 되었다. 법정동인 남산동1~3가는 행정동인 명동(明洞) 관할 하에 있다.
남산초등학교 자리는 조선 후기의 무신 나홍좌(羅弘佐)의 집터였다. 박물관으로는 1998년 10월에 개관한 초전섬유 · 퀼트박물관이 있다.
동쪽은 필동2가 · 장충동2가, 남쪽은 용산구와 접해 있으며 서쪽은 회현동1가 · 남산동2·3가, 북쪽은 주장동 · 남학동 · 필동1가와 접해 있다. 이 마을에 조선시대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는 훈련장이 있었는데 그 훈련장을 ‘예장’(藝場)이라 불렀던 사실에 근거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46년에 예장동이 되었으며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명동(明洞)과 필동(筆洞) 관할 하에 있다. 이 동은 남산공원이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유적으로 국사당 터와 독립운동가 김익상(金益相)의사 의거 터 등이 있다.
동쪽과 남쪽은 장충동, 서쪽은 예장동 · 주자동, 북쪽은 충무로와 접한다. 조선시대 이 마을에 남부의 부사무소(部事務所)가 있어 부동(部洞)이라고 하였는데 부동이 와전되어 ‘붓골’이라 하였으며, 이 ‘붓골’을 한자로 표기해 필동이 되었다. 1943년 중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필동1·2·3가로 바뀌었다. 이 동은 법정동인 필동1·2·3가, 남학동(南學洞), 주자동(鑄字洞), 예장동(藝場洞), 충무로3가로 이루어져 있고, 장충동2가와 충무로4가 일부의 행정도 담당한다.
동쪽은 필동1가, 남쪽은 예장동, 서쪽은 주자동, 북쪽은 퇴계로를 가운데 두고 충무로3가와 잇닿아 있다. 조선시대 사부학당(四部學堂)의 하나인 남부학당(南部學堂)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남학골’이라고도 하였다.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 일지출정(日之出町)이 되었다가 1946년 남학동이 되었다. 법정동인 남학동은 행정동인 필동(筆洞) 관할 하에 있다. 북쪽으로 퇴계로, 서쪽으로 수표다리길, 서남쪽으로 남산 제2호터널 진입로가 지나는 등 교통이 발달하였다. 1번지와 12번지 일대는 조선시대의 관청인 균역청(均役廳)의 터이다.
동쪽은 남학동, 서쪽은 남산동3가, 남쪽은 예장동, 북쪽은 퇴계로를 사이에 두고 충무로2가와 마주보고 있다. 이 마을에 조선시대 활자를 만들었던 주자소(鑄字所)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 주정(鑄町)이 되었다가 1946년 주자동이 되었다.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필동(筆洞) 관할 하에 있다. 4~7번지 일대는 조선시대에 활자를 주조하던 주자소의 터이며, 5번지 부근에 주자교, 6번지에 일본영사관 등이 있었다.
동쪽은 신당동, 서쪽은 필동, 남쪽은 용산구 한남동, 북쪽은 광희동 · 묵정동 · 쌍림동과 접한다. 구한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과 열사들을 위해 제(祭)를 올리던 장충단(奬忠壇)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1943년 중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동서헌정은 장충동1가로, 서사헌정은 장충동2가로 바뀌었다. 장충동1가에는 관우(關羽)의 영정을 모신 성제묘(聖帝廟)가 있어 매년 봄 · 가을에 제사를 지내며, 장충동1가를 남북으로 통과하는 장충단길 주변에는 동의 명물인 돼지족발집이 밀집해 있다.
동쪽과 남쪽은 장충동1·2가, 서쪽과 북쪽은 충무로2가 · 필동3가와 접해 있다. 옛날 먹절골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먹절골에는 먹절 또는 묵사(墨寺)로 부르던 절이 있어 먹절골 · 묵동 · 묵사동 등으로 부른다. 1946년 묵정동이 되었다. 법정동인 묵정동은 행정동인 장충동 관할 하에 있다. 190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의해 집단거류민지역으로 바뀌면서 쌍림동과 묵정동 일대에 신정유곽(新町遊廓) 단지가 형성되었고, 그 동쪽인 이곳에 한국인 중심의 유곽이 형성되었다. 1979년에 불량주택 재개발이 시행되었고, 의료기관으로는 종합병원인 제일병원이 있다.
동쪽은 신당동, 서쪽은 쌍림동, 남쪽은 장충동, 북쪽은 을지로와 접해 있다. 동 이름은 도성 8문 가운데 하나인 광희문(光熙門)이 있는 데서 붙여졌다. 1943년 중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광희동1·2가로 바뀌었다. 광희동은 법정동과 행정동의 명칭이 같은데, 광희1·2가 · 쌍림동 · 을지로6·7가로 이루어져 있고, 오장동 일부 지역의 행정도 맡고 있다. 조선시대에 광희문과 흥인지문 중간 지역이어서 두 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객주집이 발달하였다.
동쪽은 광희동2가 · 장충동1가, 남쪽은 장충동2가, 서쪽은 묵정동 · 충무로5가 · 오장동, 북쪽은 마른내길을 사이에 두고 광희동1가와 접해 있다. 마을 입구에 도적을 경비하던 이문을 세우고 그 이문(里門) 한 쌍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원래 쌍이문동(雙里門洞)이라 부르던 것이 음이 와전되어 쌍문리가 되었다가 쌍리동이 되었고, 쌍리동이 쌍림동이 되었다.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 병목정이 되었다가 1946년 쌍림동이 되었다.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광희동 관할 하에 있다. 북쪽은 상업지역, 남쪽은 주택지가 조성되어 있다.
동쪽은 훈련원로를 경계로 하여 쌍림동 · 광희동1가, 남쪽은 충무로, 서쪽은 예관동, 북쪽은 을지로4·5가와 접해 있다. 옛날 이 마을에 다섯 장사가 살았다 해서 ‘오장삿골’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오장동(五壯洞)’이라 하였다.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 초음정(初音町)이 되었다가 1946년 오장동이 되었다.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광희동 관할 하에 있다. 유명한 냉면집이 즐비하며, 도매시장으로 건어물 전문시장인 중부시장이 있다.
중구 태평로1가에서 서울시청에서 을지로7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이르는 곳이다. 동명 유래는 고대 중국 수(隨)의 대군을 격파시킨 고구려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1943년 중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을지로1~7가로 나누어졌다. 종로 · 청계천로 · 퇴계로와 함께 서울시의 대표적인 상업 · 업무지구로서, 조선시대에는 구리개로 불리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황금정통(黃金町通)으로 불렸다. 고층건물의 집중도가 떨어지고 개발이 늦어지다가 1984년 지하철 2호선 완공과 함께 블록 단위로 재개발되었다. 1·2가 일대는 플라자호텔 · 프레지던트호텔 · 뉴코리아호텔 · 롯데호텔 등의 고급호텔과 백화점, 각종 금융기관이 밀집해 있으며, 3가에는 인제대학교부속백병원 · 을지병원 등의 의료기관이 있다. 4·5가 주변에는 방산시장 · 중부시장 등 대형 재래시장을 비롯하여 세운상가 · 삼풍상가 · 풍전상가 등의 상가아파트, 건축내장재 · 인쇄 · 공구 · 조명기구 상가 등이 밀집해 있으며, 6·7가 일대에는 스포츠용품 상가와 신평화 · 동평화 · 청평화 시장 등 의류도매시장이 가까이 있다.
동쪽은 성동구 상왕십리동 · 금호동 · 옥수동, 서쪽은 을지로 · 광희동 · 장충동, 남쪽은 용산구 한남동, 북쪽은 종로구 창신동 · 숭인동과 접한다. 동 이름은 광희문 밖에 있는 신당(神堂)을 중심으로 많은 무당들이 모여 무당촌을 이룬데서 신당(神堂)이라 부르다가 갑오개혁 때 발음이 같은 신당(新堂)으로 바뀌었다. 1943년 성동구에 편입되었다. 1946년 신당동으로 바뀐 후 1975년 중구 관할이 되었다. 신당동은 법정동과 행정동의 명칭이 같은데, 행정동인 신당1~6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당1동사무소에서는 흥인동과 무학동의 행정도 담당하고 있다. 신당동 일대에는 1920년까지만 해도 많은 묘지가 있었고, 일본인 전용 화장터인 신당리 화장장이 있었다.
동쪽은 황학동, 서쪽은 신당1동, 남쪽은 무학동 · 신당5동, 북쪽은 청계천로를 경계로 종로구 창신1동과 구계를 이루고 있다. 동대문의 이름인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유래되었다.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성동구 신당정이 되었다가 1946년 신당동이 되었다. 1966년 성동구 흥인동이 되었고, 1975년 10월 구(區)의 관할 구역 변경에 따라 중구 흥인동이 되었다. 법정동으로 1970년 5월부터 행정동인 신당1동 관할 하에 있다.
동 · 서 · 남쪽은 신당동, 북쪽은 왕십리길을 사이에 두고 흥인동과 접해 있다. 무학봉(舞鶴峰)의 산 이름에서 따온 동명으로 학이 봉우리에서 춤을 추었기 때문에 무학봉이 되었다고 하며, 이 무학봉 남쪽 기슭에 있던 마을을 무학골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1936년 4월 경성부 하왕십리정이 되었다가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성동구 하왕십리정이 되었다. 1946년 하왕십리동이 되었고 1966년 성동구 무학동, 1975년 구(區)의 관할 구역 개편으로 중구 무학동이 되었다. 법정동인 무학동은 1970년 5월부터 행정동인 신당1동 관할 하에 있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하여도 무당들이 매우 많았다.
동쪽은 성동구 상왕십리동, 서쪽 흥인동, 남쪽 신당5동, 북쪽은 청계천로를 경계로 종로구 숭인동과 구계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명 유래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옛날 이곳 논밭에 황학(黃鶴)이 날아왔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재 신당5동 관내의 자연마을의 하나인 백학동(白鶴洞)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치해서 황학동이 생기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
1943년 성동구에 편입된 뒤, 1946년 신당동으로 바뀌었다. 1966년 황학동이 법정동으로 분동되어, 1975년 중구 관할로 되었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중기까지도 대부분 논밭이었으나 현재는 중앙시장과 상가들이 밀집해 있다. 중앙시장은 성동시장이라는 이름으로 1946년 설치되었는데, 미곡과 채소 등의 집산 도산매시장으로서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과 함께 3대 시장으로 손꼽던 시장이다. 황학동 벼룩시장은 일명 도깨비시장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현대인들이 바쁜 생활 중에서도 옛 풍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황학동 중고품시장은 만물상들의 집합소여서 필요한 물건을 언제든지 구할 수 있고 값이 저렴하다. 왕십리길 주변이 채소와 곡류 중심 시장이라면, 청계천변은 중고품시장으로서 구역별로 전자골목, 가구골목, 자동차부속품골목, 의류골목, 구두골목 등이 있다.
동쪽은 의주로2가 · 봉래동2가, 서쪽은 마포구, 남쪽은 만리동1·2가와, 북쪽은 서대문구 합동과 구계를 이루고 있다. 동명 유래는 반석방(盤石坊)과 약전중동(藥田中洞)의 ‘중(中)’자와 한림동(翰林洞)의 ‘림(林)’자를 따서 붙여졌다. 1943년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가 1946년 중림동으로 바뀌었고, 1975년 중구 관할이 되었다. 이 동은 법정동과 행정동의 명칭이 같은데, 중림동, 의주로2가, 만리동1·2가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 양정중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손기정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의주로12가로 이루어져 있다. 의주로1가 동쪽은 순화동, 서쪽은 서대문구 합동, 남쪽은 의주로 2가, 북쪽은 충정로 1가와 접해 있다. 의주로2가 동쪽은 서소문동 · 남대문4가, 서쪽은 중림동, 서대문구 합동, 남쪽은 봉래동 2가 · 중림동, 북쪽은 의주로1가와 접해 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의주(義州) 즉, 신의주로 가는 길목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에 의해 붙여진 이름 중 아직 개명하지 못한 동명 중 하나이다. 의주로12가는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서대문구 의주통12정목이 되었으며, 1946년 의주로12가가 되었다가, 1975년 구(區)의 관할구역 변경에 따라 중구 의주로12가가 되었다. 법정동인 의주로12가는 행정동인 소공동과 중림동 관할 하에 있다. 유적으로 보루각(報漏閣) 터가 있으며, 휴식공간으로 서소문공원 · 의주로공원 등이 있다. 서소문공원은 갑신정변에 관련된 자들이 처형된 곳으로, 고려의 명장 윤관(尹瓘)의 동상과 순교자현양비, 조선시대 중죄인을 처형하던 참터[斬址] 등이 있다.
만리동12가로 이루어져 있다. 만리동1가 동쪽은 봉래동2가, 서쪽은 만리동2가, 남쪽은 서대문구 서계동, 북쪽은 중림동과 접해 있다. 만리동2가 동쪽은 만리동1가, 서쪽은 서대문구 아현동, 남쪽은 서대문구 서계동, 북쪽은 중림동과 접해 있다. 만리현(萬里峴)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도 하며, 일설에는 세종 때 최만리(崔萬里)가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광복 후 처음 만들어진 동명이다. 1943년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서대문구 봉래정34정목이 되었다가 1946년 만리재의 이름을 따서 만리동1~2가가 되었다. 1975년 서대문구에서 중구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1980년 만리동사무소가 폐동되어 중림동 관할구역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1986년부터 불량주택 재개발사업이 시행되었다. 특히 만리동2가는 마포구 공덕동으로 넘어가는 만리고개가 있는데 조선시대부터 편싸움[石戰]을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남대문로15가로 되어 있다. 남대문로는 남대문이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 1943년 중구 남대문통15정목이 되었다가 1946년 남대문로1~5가가 되었다. 서울의 대표적인 상업지구이며, 특히 전문상품을 취급하는 소매점이 많다. 대규모 도매시장인 남대문시장이 있다.
동쪽은 을지로6가, 서쪽은 주교동, 남쪽은 을지로5가, 북쪽은 동대문시장과 연결되어 있다. 마을 부근에 있는 가산(假山) 또는 조산(造山)이라 부르던 곳에 무궁화꽃이 많아 그 향기에서 연유되었다. 1943년 중구 방산정(芳山町)이 되었다가 1946년 방산동이 되었다. 1977년 방산동은 을지로3·4·5가의 관할구역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봉래동12가로 이루어져 있다. 봉래동1가 동쪽은 남대문로5가, 서쪽과 남쪽은 봉래동2가, 북쪽은 남대문로4가 · 서소문동 · 순화동과 접해 있다. 봉래동2가 동쪽은 남대문로5가, 서쪽은 중림동 · 만리동1가, 남쪽은 동자동, 북쪽은 봉래동1가 · 의주로2가와 접해 있다. 봉래교(蓬萊橋)라는 다리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 봉래정12정목이 되었다가 1946년 봉래동1~2가가 되었다. 1970년 남대문로5가의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봉래동2가는 강우규(姜宇奎)의 사이토총독저격사건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봉래동1가는 칠패시장이 있던 자리이다.
동쪽은 주교동, 서쪽은 을지로4가, 남쪽은 입정동, 북쪽은 청계천로를 사이에 두고 종로구와 구계를 이루고 있다. 살리뭇골이라는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발음상 살리뭇골을 한자로 표기해서 붙인 이름인 것으로 보이나, 산림과는 관계없는 하천변의 평지에 형성된 마을이다. 1943년 중구 임정으로 하였다가 1946년 옛 자연마을의 이름인 살리뭇골의 이름을 따서 산림동이 되었다. 1977년 을지로4·5가동의 관할구역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쪽은 청계천로에서 종로구 관철동 · 장교동 · 수하동, 서쪽은 남대문로 1가, 남쪽은 수하동, 북쪽은 종로구 관철동과 마주보고 있다. 이곳의 지형이 서쪽은 넓고 동쪽으로 가면서 좁아지는 삼각형으로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43년 중구 삼각정이 되었다가 1946년 삼각동이 되었다.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명동 관할 하에 있다. 이 외에 부봉미술관이 있다.
동쪽은 태평동2가, 서쪽은 순화동, 남쪽은 남대문로4가, 북쪽은 정동과 접해 있다. 도성 4소문의 하나인 서소문이 있는데서 유래되었다.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서대문구 서소문정이 되었다가 1946년 서소문동이 되었다. 1975년 구(區)의 관할구역 변경에 따라 중구 서소문동이 되었다.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소공동 관할 하에 있다. 1980년대 초부터 도시 미관 및 효율적인 토지 이용을 위하여 재개발이 시행되었다. 유적으로 소덕문(서소문) 터와 태평관 터, 융희 1년(1907)에 일어난 정미의병의 발원지(58-17번지) 등이 있다. 1974년에 개관한 류관순기념관 · 중앙문화센터 등이 있다.
동쪽은 입정동, 서쪽은 장교동, 남쪽은 을지로2·3가, 북쪽은 계천로를 구계로 종로구 관수동과 접해 있다.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 수표정이 되었다가 1946년 수표동이 되었다.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명동 관할 하에 있다.
동쪽은 장교동, 서쪽은 삼각동 · 남대문로1가동, 남쪽은 을지로2가, 북쪽은 종로구 관철동과 구계를 이루면서 삼각동과 마주하고 있다. 남산에서 발원한 창동천(倉洞川)이 흘러가는 물 아래쪽에 있어 물아랫골로 부르던 것을 한자 표기한 것이 수하동이다.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 수하정이 되었다가 1946년 수하동이 되었다.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명동 관할 하에 있다. 유적으로 64번지 부근에 조선시대의 관청인 도화서(圖畵署) 터가 있는데, 원래 견평방(종로구 공평동 · 인사동 · 청진동 부근)에 있던 것을 뒤에 수하동으로 이전하였다.
동쪽은 정동, 서쪽은 의주로1가, 남쪽은 봉래동1가, 북쪽은 종로구 평동과 구계를 이루고 있다. 순청동(巡廳洞)의 순(巡)자와 화천정(和泉町)의 화(和)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서대문구 화천정이 되었다가 1946년 순화동이 되었다. 1975년 구(區)의 관할구역 변경에 따라 중구 순화동이 되었다.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소공동 · 회현동 관할 아래 있다. 유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울연통부의 터가 있는데, 현재의 동화약품공업㈜ 본사 자리이다. 호암아트홀과 순화공원이 있다.
동쪽은 오장동 · 충무로5가, 남쪽은 충무로4~5가, 서쪽은 인현동2가, 북쪽으로 을지로4가와 접하고 있다. 조선시대 마을에 예관, 즉 인쇄소인 교서관(校書館)이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 화원정(花園町)이 되었다가, 1946년 예관동이 되었다.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광희동 관할에 있다.
인현동12가로 이루어져 있다. 인현동1가 동쪽은 인현동2가, 서쪽은 초동, 남쪽은 충무로4가, 북쪽은 을지로34가와 접해 있다. 인현동 2가 동쪽은 예관동, 남쪽은 충무로4가, 서쪽은 인현동1가, 북쪽은 을지로4가와 접해 있다. 조선시대 선조의 일곱번째 아들 인성군(仁城君)의 집이 있는 고개라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신설된 중구 앵정정12정목이 되었다가 1946년 인현동12가가 되었다. 유적으로 인현동2가에 동평관 터와 유성룡(柳成龍) 집터 등이 있다. 휴식공간으로 인현공원이 있다.
동쪽은 방산동 · 을지로5가, 남쪽은 을지로4가, 서쪽은 산림동, 북쪽은 종로구와 접해 있다. 이 마을 126번지 북쪽에 배다리, 즉 주교가 있던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 주교정이 되었다가, 1946년 주교동이 되었다. 1977년 을지로3·4·5가동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종합도매시장으로 방산종합시장이 있는데, 이곳은 조선시대에 화약을 제조 · 관리하던 염초청이 있던 자리이다.
동쪽은 산림동, 서쪽은 수표동, 남쪽은 을지로3가, 북쪽은 청계천로를 사이에 두고 종로구와 구계를 이루고 있다. 갓을 만드는 집에 우물이 있어 갓방우물골이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1943년 중구 입정정이 되었다가 1946년 입정동으로 바뀌었다. 1977년 을지로3·4·5가동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동쪽은 인현동1가, 서쪽은 저동2가, 남쪽은 충무로3가, 북쪽은 을지로3가와 접해 있다. 조선시대 개초(蓋草) · 마(麻) · 갈(葛) 등을 파는 초물전(草物廛)이 있던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도 초전골로 전해오고 있다. 1943년 6월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 약초정이 되었다가 1946년 초동이 되었다. 1985년 충무로4·5가동의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명보아트홀(구 명보극장) 앞에는 이순신장군의 탄생지라는 표석이 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때 순국 자결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의 시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쪽은 정동, 서쪽은 서대문구 충정로 3가, 남쪽은 충정로3가 · 합동, 북쪽은 서대문구 충정로2가 · 냉천동과 구계를 이루고 있다. 1943년 서대문구 죽첨정(竹添町)이 되었다가 1946년 서대문구 충정로1가로 하였다. 1975년 충정로1가는 중구 관할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고, 충정로2·3가는 서대문구에 속해 있다.
태평로1~2가로 되어 있다. 태평로1가 동쪽은 무교동, 서쪽은 정동, 남쪽은 을지로 1가 · 소공동, 북쪽은 종로구 세종로동과 구계를 이루고 있다. 태평로 2가 동쪽은 북창동 · 소공동, 서쪽은 서소문동, 남쪽은 남대문로4가, 북쪽은 태평로1가와 접해 있다. 조선시대 서소문동에 있던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태평관(太平館)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1943년 중구 태평동1·2정목으로 되었다가 1946년 태평로1·2가로 되었다. 1975년 태평로1가동사무소가 설치되었다. 태평로2가는 소공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세종대로 110(구 태평로1가 31번지)에 서울시청이 있다. 구 서울특별시청 청사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준공된 경성부 청사를 여러 차례에 걸쳐 개축, 보수하여 사용하다가 2012년 신청사가 완공된 후 서울도서관으로 용도가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
충무로15가로 되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장군의 시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1943년 중구 본정15정목이 되었다가 1946년 이순신장군의 시호인 충무공을 따서 충무로1~5가가 되었다. 1985년 충무로1·2가는 명동사무소 관할 아래, 충무로3가는 필동동사무소 관할구역이 되었으며, 충무로4·5가는 충무로4·5가 동사무소 관할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은 개항 이후 일본인의 진출이 두드러져 상권 형성이 제일 먼저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에 구획정리가 잘 되어있다. 광복 이후에는 영화인의 거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