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구 ()

강북구청
강북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서울특별시 동북단에 위치한 구.
정의
서울특별시 동북단에 위치한 구.
개관

동쪽은 노원구·도봉구, 서쪽은 경기도 고양시, 남쪽은 성북구·동대문구, 북쪽은 경기도 양주시, 도봉구와 접해있는 서울 외곽지역이다. 위치는 동경 126°58'~127°02', 북위 37°36'~37°40'이다. 면적은 23.60㎢, 인구는 33만 873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3개 행정동(4개 법정동)이 있다. 구청은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3동에 있다.

자연환경

북한산 능선과 우이천(牛耳川) 서쪽을 1995년 3월 도봉구로부터 분할 받아 신설되었다. 서울 외곽에 위치하며 대부분 주거지역으로 경관이 수려한 국립공원 북한산을 배경으로 하는 수도권 최고의 쾌적한 주거지역으로 변모하고 있다.

광주산맥의 일부로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은 강북구·도봉구·성북구·은평구와 경기도 고양시·양주시 경계에 걸쳐있는 높이 837m의 산이다. 지질은 중생대 말에 관입(貫入)한 화강암이 지반의 상승과 침식작용으로 지표에 노출된 후 절리(節理)와 표면의 풍화작용으로 산세가 험하고 경사가 심한 암벽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북한산으로부터 석계에 이르는 우이천은 번동과 수유동 일대를 통과하는 개방 하천이다.

인근에 삼각산이 있고 시 외곽에 위치하고 있어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 몬순 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연평균 기온은 13.3°C, 1월 평균기온은 0.4°C, 8월 평균기온은 26.5°C, 연 강수량은 1,212.3㎜이다.

역사

강북구 지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2000년 이상 되었으며, 서기전 18년경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등 백제의 건국 집단이 국도로 조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지역은 계속 백제에 속하였다가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백제의 위례성을 함락시킴에 따라 고구려의 통치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이때 고구려는 군현제에 따라 이 지역에 매성군(買省郡, 일명 昌化)을 설치하였다.

도읍을 웅진으로 옮긴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손을 잡고 잃어버렸던 한강 유역과 북한산을 회복하지만, 진흥왕이 백제를 다시 공격하여 이 지역을 장악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전략적 요충지인 북한산을 서로 차지하려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진흥왕은 북한산을 신라의 국경으로 삼는다는 순수비를 세웠다. 2년 뒤 한강 이북 지역에 행정구역인 북한산주를 설치하였고, 757년(경덕왕 16) 내소군(來蘇郡)을 설치하였다.

고려 태조 때는 내소군의 명칭을 견주(見州)로 고치고, 신라 때의 한양군(漢陽郡)을 양주(楊州)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양주에 지군사(知郡事)의 관직을 두어 견주와 함께 관장하게 하였다. 1081년(현종 9)에는 견주를 양주에 편입하였다. 고려 말 우왕 때의 최영(崔瑩) 장군은 중흥성(북한산성의 전신)을 축조하여 군대를 주둔시킨 바 있으며, 원증국사(圓證國師) 보우가 중흥사(重興寺)를 중건하고 그 옆에 태고암을 지었다.

1394년(태조 3) 10월 28일 양주 고을의 범위 안에서 도읍을 정하여 한양으로 천도함에 따라 도읍으로 정해진 지역만 한성부(漢城府)라 칭하고, 현 강북구 지역을 포함한 기타 양주관할지역은 그대로 양주에 속하게 하였다. 1396년 4월에 한성부 오부(五部)의 방(坊)과 리(里)의 이름을 정하여 경계표석을 세웠는데, 이때 강북구 지역인 미아동·번동·수유동·우이동은 동부(東部) 숭신방(崇信坊)에 속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수도 한성이 점령당하고 왕이 멀리 피신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북한산성 축조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숙종이 전란 시 피난처 및 방어지로 삼기 위해 6개월 만에 약 8.5㎞(7,620보)에 이르는 오늘의 북한산성을 축조하였다. 1718년 북한산성의 외성으로 인왕산 동북쪽과 북한산 비봉을 잇는 탕춘대성을 축조하였다. 숙종 이후 북한산성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이 약화되어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자 방치되었고, 또한 전란시의 화재, 자연재해 등으로 성곽을 비롯한 주요시설과 사찰들이 크게 훼손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한성부 오부의 명칭을 오서(五署)로 바꾸었는데, 동서 숭신방은 성외(城外)로 밀려나게 되었다. 1895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양주군은 23부제(23府制)에 따라 한성부 소속의 군이 되었으며, 이듬해 칙령 제36호에 의해 13도제(13道制)가 됨에 따라 양주군은 경기도의 3등 군이 되었다.

1910년 일본의 직제 변경 정책에 따라 이듬해 1911년에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칭되면서 그 지위가 격하되어 경기도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성외 8개 방을 8개의 면(面)으로 고쳤는데, 이때 미아동·번동·수유동·우이동을 관할하던 숭신방은 숭신면이 되었다.

1912년 5월 23일에 공포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의하면 양주군은 32개 면, 343개 동리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해동촌면에 우이리(牛耳里)가 소속되었다. 1914년 양주군은 16개의 면과 148개의 리로 폐치분합(廢置分合)되면서 노원면과 해등촌면이 합쳐져 노해면이 되었다. 그러나 노해면에 소속된 리의 명칭 중에는 우이리가 보이지 않는다. 같은 해 4월 경성부 지역이 ‘부·군(府·郡)의 명칭·위치 및 관할구역의 개정’에 따라 대폭 축소되면서, 숭신면은 인창면의 많은 지역과 합쳐져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으로 개편되었다.

당시 북한산에는 일본 헌병대가 주둔하여 의병과 독립군이 북한산을 거점으로 삼을 것을 우려해 북한산성 내 대부분의 시설과 사찰을 불태웠고, 1927년 백운봉에 쇠 난간을 설치하고 철심을 박아 민족정기의 훼손을 기도하였다. 철심은 1980년대에 모두 제거되었다. 북한산 백운봉 최정상 바닥 암반에 3·1독립운동의 정신, 민족의 얼이 69자로 새겨져 있다. “독립선언서는 기미년 2월 10일에 육당 최남선이 썼고, 3월 1일 탑골공원의 독립선언만세는 정재용이 도창했다”는 내용이다.

이 지역은 원래 경기도 행정구역에 속해 있던 전형적인 자연마을로, 광복 이후 1949년 8월 13일 서울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새로 설치된 성북구에 번동·우이동·수유동·미아동이 편입되면서, 이때 성북구 숭인출장소가 설치되어 이 지역을 관할하였다.

서울의 외곽에 위치하여 대부분 주거지역으로 베드타운 기능을 하고 있으며 1960, 70년대 도심철거민 등이 집단으로 미아동 등의 일부 지역에 이주·정착되었다. 1973년 7월 1일을 기해 대통령령 제6548호에 따라 성북구 숭인출장소와 노해출장소 관할지역을 편입해 도봉구가 만들어졌다. 이때 미아동은 1동부터 10동까지, 번동·수유동은 1동에서 3동까지 있었다. 1975년 적정인구 2만 명을 내외로 하는 행정동의 통합·분동을 실시하여 도봉구는 행정동 24개 동으로 조정되었다. 1988년 1월 1일 인구 90만 명에 이르는 거대구가 된 도봉구를 분구하여 도봉동·창동·상계동·중계동·하계동·공릉동·월계동의 16개 동으로 노원구를 신설하였다. 하지만 노원구 신설 후에도 도봉구는 계속해서 인구가 증가해 80만 명에 이르게 되자 주민 편익과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1995년 3월 1일 미아동·번동·수유동·우이동 4개 법정동과 지역을 관할하는 18개 행정동으로서 강북구가 만들어졌다. 1998년 9월 28일 강북구동사무소설치조례(제298호)를 개정하면서 주거불량지역 재개발로 인해 인구가 급격히 감소한 미아6동과 미아7동을 통합해 미아6·7동이 되어 17개의 행정동이 있었다.

또한 2008년 6월 30일에 미아1동과 미아2동이 통합하여 삼양동으로, 미아3동을 미아동으로, 미아4동과 미아9동을 통합하여 송중동으로, 미아5동과 미아8동을 통합하여 송천동으로, 미아6·7을 삼각산동으로, 수유4동을 우이동으로, 수유5동 수유6동을 통합하여 인수동으로 변경하였다. 현재 강북구는 13개 행정동을 두고 있다.

유물·유적

불교문화재로 삼성암(三聖庵), 보광사(普光寺), 백련사(白蓮寺), 화계사(華溪寺), 용덕사(龍德寺), 도선사(道詵寺) 등이 있다.

우이동의 도선사에는 신라 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도선사 마애불입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77년 지정)있고, 화계사에는 사인비구 제작 동종-서울 화계사 동종(보물, 2000년 지정), 화계사 대웅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이 있다. 수유동 본원정사 명부전에는 본원정사 목 보살좌상(지장보살)(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2001년 지정)이 모셔져 있다.

봉황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1969년 지정)은 1912년에 세워진 천도교의 연성도장(煉性道場)으로 의창수도원(義彰修道院)이다. 천도교의 제3세 교조인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선생이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점되자 1912년 이곳에 봉황각을 세워 천도교 교역자들에게 종교적 수련을 통하여 보국안민의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3·1운동의 구체적인 계획을 구상하였던 곳이다.

북한산성(사적 제162호, 1968년 지정)은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뺏고 빼앗기던 한강 북방의 군사 요지이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침을 당하여 도성 외곽의 축성론이 일어나 1711년(숙종 37)에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하여 7,620보의 석성이 만들어졌다. 1745년(영조 21) 승려 성능(性能)이 지은 『북한지(北漢誌)』에는 북한산성의 축조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성의 둘레는 12.7㎞이며 성안의 면적은 200만여 평으로 훼손된 대남문·대성문·대동문·보국문과 성곽들은 일부가 복원되었다.

번동의 서울 창녕위궁 재사(국가등록문화재, 2002년 지정)는 조선 제23대 순조의 둘째 딸 복온공주(福溫公主)와 부마 김병주(金炳疇) 선생의 재사(齎舍)이다. 강북구 관내 드림랜드 입구에 위치한 이 재사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목조와즙 건물로 우측의 사랑채는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난 신경진(申景禛)의 별장이었으며, 복온공주의 후손 김석진(金奭鎭)선생이 한일합방 때 울분을 참지 못하여 순국 자결한 곳이기도 하다. 건물 오른쪽 사랑채는 신경진의 별장으로 지어져 원형 그대로 보존된 고가이다. 좌측 재사는 1800년대에 건축되었으며, 정면 안채는 광복 후 개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재건축된 건물로 역사적 사실 및 건축양식 등이 매우 가치가 높다.

선열묘역으로는 수유동에 이준(李雋) 열사, 독립운동가 이시영(李始榮), 신익희(申翼熙), 음악가이며 교육가인 현제명(玄濟明), 소설가 김억(金億), 염상섭(廉想涉) 등의 묘소가 있다. 우이동·수유동 일대에는 성균관대학 창립자 김창숙(金昌淑), 3·1운동 민족대표 이명룡(李明龍), 건국훈장독립장을 받은 조병옥(趙炳玉), 유림(柳林), 김병로(金炳魯) 등이 있고, 이외에도 손병희(孫秉熙), 여운형(呂運亨), 지청천(池靑天) 등의 묘소와 광복군 합동묘소가 있다.

수유동에는 국립 4·19묘지가 있다. 1993년 10월부터 성역화 조성공사가 시작되면서 묘지 크기는 약 4만 평으로 확장되었으며, 유영봉안소, 4·19탑, 상징문, 상징조형물로 조성되었다.

교육·문화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14개교, 중학교 13개교, 고등학교 7개교가 있고, 특히 한빛맹아학교, 서울애화학교, 서울정인학교 등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가 3개교 있다. 사랑의 집은 정신장애인 사회복귀시설로 직업재활훈련과 사회기술훈련 등을 실시하고 있다. 대학으로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이 있다.

강북문화정보센터, 강북청소년문화정보센터가 있어 첨단기술 교육을 통한 사회교육에 이바지하고 있다. 강북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는 직업훈련, 창업보육센터 등을 운영하여 여성들의 취업 및 사회활동을 돕고 있다. 통일교육원은 통일문제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전문요원을 양성하며, 관련 자료를 개발하여 보급하고 있다. 또 북한관을 운영하여 북한의 실상을 알려주기도 한다. 문익환 목사의 북한방문 기념을 위한 통일의 집, 구립청소년수련원과 문화의 집, 도봉청소년수련원 등이 각종 사회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공연장이 있고, 지역문화 복지시설로 구민회관과 복지회관, 강북청소년수련관이 있다. 지역 문화예술의 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강북문화원, 삼각산문화예술회관이 있다. 강북문화원, 강북청소년수련관, 삼각산문화예술회관에 강당·소극장·전시실 등이 마련되어 있어 영화·연극·합창공연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강북문화정보센터, 솔샘문화정보센터, 청소년문화정보센터는 도서관 이용 및 문화강좌를 통한 문화 지식 정보의 공간이고, 이 밖에 작은도서관, 강북구립정보화도서관, 마을문고 등이 있다. 강북구문인회, 강북미술인협회, 강북사진작가협회, 강북여성합창단 등 지역문화예술단체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아울러 강북구립청소년오케스트라가 2006년 2월에 창단되어 활동하고 있다. 우이동 시인들은 매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5시부터 도봉도서관에서 시낭송회를 개최하고 있다.

북한산 수유리 일대는 불교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도선사는 한국불교가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정화 유신 운동을 선도한 청담대사가 여기서 원력을 세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국광복을 기원하며 1911년에 세워진 천도교 교당인 봉황각이 위치하며 후대에는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개신교 교당이 많이 세워졌다.

우이동에 있는 박을복자수박물관은 전통자수와 근·현대회화의 흐름을 결합시켜 한국 현대자수 발전에 기여한 박을복 선생의 작품 40여 점을 전시하여 그동안 관람이 용이하지 않았던 감상 자수를 일반에게 선보이고 있다.

북한산 일대에는 배드민턴, 탁구, 체조 등을 할 수 있는 각종 운동시설과, 오동근린공원 골프연습장, 눈썰매장, 수영장 등이 있다. 그리고 강북웰빙스포츠센터, 우이천자전거도로, 솔밭근린공원 놀이마당, 배드민턴장, 운동장, 삼원실내수영장, 오동골프클럽 등이 있다.

민속

자연과 인간의 조화에 바탕을 한 사상, 지배자의 권력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사상 등이 혼합된 인간사회에서는 고대로부터 각종 제(祭)가 성행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북한산제, 기우제, 포제, 기설제, 고유제 등의 무속신앙과 마을 제의로 번동 부군당, 벌리 도당굿, 북한산 도당굿, 율곡교육촌의 망부석신앙 등이 있다. 특히 북한산 도당제(都堂祭)는 연희성이 짙은 가무로 부락민을 흥겹게 하고 마을의 안녕질서를 신에게 기구했던 산신제이다. 도당제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고려 충렬왕 때로 추정되고 있다. 매년 음력 삼월 삼짇날, 2칸 정도 크기의 당집(우이동 252번지)이 있던 마을 뒷산 당목 아래 가로 5자, 세로 8자에 2자 높이의 제단을 쌓고 산신, 도당신, 산륭, 부군, 군웅, 상산대감과 장군신을 모시는 대동제이다.

설화·민요

옛날 아름다운 삼각산과 도봉산이 만들어지고 많은 세월이 지났을 때 거북이가 황해에서 한강으로 올라와 그 큰 몸으로 한양을 엉금엉금 기어다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에 놀란 시민들과 군사들이 동원되어 한강으로 쫓아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거북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왕산을 거쳐 북한산으로 기어올라 아름다운 경관이 크게 훼손되었다. 이를 본 인왕산, 삼각산, 북한산, 도봉산의 산신령들이 놀라 힘을 합쳐 노원구 상계동의 수락산 쪽으로 쫓아 보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큰 거북이가 완강히 버티는 바람에 산신령들과 밀고 당기다가 끝내 미아동 산 837-1040번지에 와서는 서로 치고 받고 피를 흘리는 격심한 싸움으로 변하였다. 이 싸움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던 하느님은 이를 보다 못해 난폭한 거북이는 커다란 바위로, 창피하게 싸움을 벌인 산신령들은 단풍나무 숲으로 만듦으로써 매년 가을 거북바위는 단풍 속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게 되었다. 이에 하늘의 신선도 아름다운 경치에 반하여 이곳에 내려와 장기를 두는 등 놀이터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현재의 거북바위 주변에는 많은 가옥이 들어서서 주위의 단풍나무들이 자취를 감추고 거북바위는 손상되어 옛날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을 수 없으며, 미아지역의 재개발 구역에 편입되어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산업·교통

강북구의 전체면적은 23.60㎢로 이 중 60.1%가 공원녹지 지역이다. 상업지역은 1.5%, 주거지역은 38.4%이다. 강북구는 2005년 11월 서울시의 승인을 받아 수유역과 수유사거리 일대 35만 6천㎡에 대한 도시설계를 확정, 공고하였다. 이에 따르면 수유역 일대 도봉로 변 상업지역에는 금융기관, 대규모 사무실빌딩 등 업무시설이 들어서게 되고 수유사거리 일대 교차로 주변에는 대규모 유통시설이 들어서는 등 수유역 일대가 상업중심지로 집중 육성되고 있다. 유동인구가 많은 수유역세권 상권은 도봉로를 낀 대로변 일대와 이면도로 주변으로 기존 상권이 확대되고 있다. 강북구청 주변 지역은 도로변의 주택이 꾸준히 상가로 개축되고 있고 상가시세는 강세를 보이고 있다.

상권은 도봉로를 양측으로 강북구청 쪽과 북부경찰서 쪽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강북구청 쪽 이면도로 쪽은 상권이 팽창하고 있다. 특히 강북구는 인구밀도가 높은데다 미아삼거리를 주변으로 대규모 주택재개발(14만 평 부지에 약 1만 가구)이 진행되고 있고 2개의 백화점이 입점할 채비를 갖추고 있어 강북 지역의 핵심 상권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하철 4호선이 지나가는 수유역 일대는 강북구의 행정 중심지이면서 의정부·포천 등 서울 북부 외곽지역으로 나가는 관문이다. 서울시 동북단에 위치하여 낙후된 도시 기반시설 및 열악한 교통여건으로 도봉로 등 주간선도로의 상시 정체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 열악한 교통여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동북부 지역 성북구·도봉구·노원구와 공동으로 광역교통문제 해결을 위한 공조체계를 강화하여 “동북부지역 교통체계개편사업”에 적극 협조하고 있다.

주간선도로인 도봉로에 간선도로 4·19길, 방학로, 삼양로, 솔샘길, 오현길, 우이동길, 월계로, 인수봉길, 한천로, 화계사길, 무너미길, 숭인로, 큰마을길이 있다.

1985년 10월 4호선이 완전 개통되어 수도권 어디에서나 접근이 용이하게 되었다. 4호선이 통과하는 미아전철역, 수유전철역은 강북구의 상업중심지구이다.

관광

강북구의 관광자원은 서울시 북쪽 외곽에 병풍처럼 솟아 있는 북한산국립공원이다. 북한산국립공원은 도심 속의 자연공원으로 수려한 자연경관이 아름답게 보전되어 있다. 북한산은 주민들의 휴식처이며 수련장인 동시에 역사교육의 현장이기도 하다. 북한산성, 5대문, 동장대, 11사 2암자, 북한산 이궁지, 북한산문고 등이 있어 사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울러 북한산 일대는 애국선열묘, 국립4·19묘지, 백련사 등이 위치하여 근현대 역사의 장이다. 강북구 지역에는 도선사·화계사 등의 명찰과 우이동 계곡, 도선사 계곡과 같은 유원지 등이 발달되어 있고, 교통 접근성이 비교적 좋아서 많은 인파가 모여들고 있다.

북한산에는 주민들의 휴식공간인 솔밭그린공원과 드림랜드가 있으며, 남북한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통일교육기관인 통일교육원이 위치해 있다. 실외수영장, 삼림욕장, 야외공연장 등을 갖춘 그린파크 훼미리랜드 호텔과 인공암장 등반이 가능한 클라이밍아카데미, 구천폭포아카데미 등이 있어 주말 가족단위의 관광객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 숙박시설로는 빅토리아관광호텔, 그린파크호텔, 아카데미하우스 등이 있고 그 외 많은 모텔과 여관이 있다.

북한산국립공원의 면적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걸쳐 78.5㎢이며, 우이령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북한산 지역과 북쪽으로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된다. 수도권 어디에서나 접근이 용이한 교통체계가 있어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공원이다. 아울러 주변 관광지로 근현대 역사의 체험장인 국립4·19 묘지와 순국선열묘역이 있다.

강북구는 1960, 70년대 도심철거민 등이 집단으로 이주, 정착하여 형성된 집단부락이었으므로 일반 거주 지역에는 전통적인 민속시장이 여전히 분포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우이시장, 북부시장, 수유시장, 수유중앙시장, 강북시장 등이 있고, 대로변에 위치하면서 현대적인 상권영역에 속하는 삼양시장, 숭인시장, 수유시장 등이 있다. 예전에는 수유2동 먹자골목이 번성하였으나 점차로 수유역 주변으로 상권이 이동하고 있다. 먹자골목도 대지극장 뒤편은 ‘남성들의 거리’라고 할 수 있다. 늦은 오후가 되면 즐비한 감자국집과 술집으로 향하는 발길이 늘어난다. 먹자골목 초입은 마을버스 이용객들로 언제나 붐빈다. 인근 동네로 향하는 마을버스의 출발지가 먹자골목 입구에 있기 때문이다.

삼각산축제가 매년 10월 셋째 주 일요일에 개최되는데, 대한민국 수도의 주산인 삼각산이 국토의 중심지역이며 우리의 조상인 환인, 환웅, 단군왕검의 삼조가 우리 조상이라는 것을 꾸준히 알리고 있다. 삼각산축제에서 삼조에게 제를 지냄은 삼조의 위업을 잊지 않고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하겠다는 큰 뜻을 담고 있다. 축제내용으로는 지역문화를 알리고자 명성황후가 행하였다는 단군청배 및 단군제례와 더불어 전통무용과 가락 등 다채로운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한편 소귀골음악회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분수령이 된 4·19혁명을 기념하기 위하여 개최하고 있다. 4·19희생영령들의 뜻을 기림으로써 민족정체성을 일깨우고, 나아가 국립4·19민주묘지를 일반 대중에게 보다 친근한 장소로 인식시킴은 물론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자연스러운 민주의식 고취 및 풍요로운 정신문화를 제공하고 있다.

그 외 강북문화원 행사 및 시상제도·전국사진촬영대회 및 사진공모전이 매년 가을 ‘삼각산축제’ 무렵에 있고, 자연보호 글짓기 그림그리기 대회, 청소년 록 페스티벌(5월 중), 난치병청소년 돕기 한마음음악회(9월 중), 백운초등학교행사 널뛰기대회 등이 있다.

동(洞)
  1. 미아동(彌阿洞)

강북구의 남쪽에 있는 동이다. 북쪽은 수유동, 동쪽은 번동, 그리고 산 능선을 경계로 성북구의 정릉동과 인접해 있으며, 남쪽은 성북구의 길음동·하월곡동과 도봉로를 경계로 하고 있다.

미아동이란 이름은 조선 말 고종 초의 공식기록에 처음 나타나는데 그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일제 때 이곳 일대에는 한국인 전용 공동묘지가 조성되었으므로 시내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상여(喪輿)가 이 고개를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고개를 넘어 미아리공동묘지에 묻히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므로 이때부터 사람들이 미아리고개라고 칭하게 되었다 한다. 한편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되너미고개(敦岩峴)를 일명 미아리(彌阿里)고개라고 부르는 까닭에 고개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설과 미아 제7동에 있는 불당곡(佛堂谷)에 미아사(彌阿寺)가 있었으므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1949년에 경기도 고양군에서 성북구로 편입되었고, 1950년 미아동으로 바뀌었다. 1973년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 신설되자 도봉구 관할로 있다가 1995년 강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북한산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적 여건 등으로 저소득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이었지만, 재개발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어 강북의 생활·문화중심지로 변모하고 있다.

  1. 번동(樊洞)

강북구의 동쪽에 있는 동이다. 북쪽과 동쪽은 우이천을 사이로 창동·월계동과 마주하고, 서쪽은 오동공원(오패산) 능선을 경계로 미아동·수유동과 접하며, 남쪽은 장위동·하월곡동과 이웃하고 있다.

번동의 동명 유래는 “이(李)씨가 한양에 도읍하리라”는 설이 퍼지자, 한양 삼각산 아래 오얏나무가 무성하다는 말을 듣고 이씨가 흥할 징조라 여겨 오얏나무를 베기 위해 벌리사(伐李使)를 보냈다는 데서 이곳을 “벌리(伐李)”라 칭하다가 “번리(樊里)”가 되었다 한다. 1949년 경기도 고양군에서 성북구로 편입되었고, 1950년 번동으로 바뀌었다. 1973년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 신설되자 도봉구 관할로 있다가 1995년 강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번1동은 교통중심지역으로 관공서와 지하철역이 있고 3개 간선도로가 인접해 있어 상가가 밀집되어 있다. 번2동은 오동근린공원이 전체 면적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공동주택이 밀집되어 있다. 번3동은 자연녹지와 드림랜드 등 대단위 휴식공간이 있는 주거지역이다.

  1. 수유동(水踰洞)

강북구의 북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번동·쌍문동, 서쪽은 경기도 신도읍(新道邑), 남쪽은 미아동, 북쪽은 경기도 고양시와 이웃하고 있다. 수유동 동명의 유래는 북한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이 마을에 넘쳤기 때문에 물 ‘수(水)’ 자와 넘칠 ‘유(踰)’ 자를 써서 붙여졌다 한다. 그래서 물이 넘친다 하여 ‘무너미’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예전 수유리와 인접해 있는 삼양동(三陽洞)이라는 마을에 삼형제가 살았는데 맏형은 바보이고 둘째는 개구쟁이며 셋째는 두 형보다는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들 삼형제가 힘을 합쳐 땅을 확보하고자 싸움을 일삼고 다니므로 이곳 주민들이 이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빨랫골의 개울을 경계로 막았는데 그 개울물이 넘쳐흘러 수유리(水踰里)라 했다고 한다.

1949년에 경기도 고양군에서 성북구로 편입되었고, 1950년 수유동으로 바뀌었다. 1973년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 신설되자 도봉구 관할로 있다가 1995년 강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수유동은 북한산 등 송림의 맑은 공기와 기암괴석의 절경, 골짜기의 맑은 물이 좋아 1960년대부터 나타난 인구 집중현상에 따라 농업은 점차 사라지고 현재 도로변에는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1. 우이동(牛耳洞)

강북구의 북쪽에 있는 동으로 서쪽은 경기도 고양시, 동쪽은 방학동·쌍문동, 남쪽은 수유동과 접해 있다. 우이란 지명은 북한산 연봉(連峰) 중에 ‘우이(牛耳)’ 즉 쇠귀같이 보이는 봉우리가 있으므로, 쇠귀봉, 곧 우이봉 아래 있다고 하여 유래되었다. 1911년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면서 경기도 경성부 숭인면 우이리로 되었다가 1914년 관할구역 개편으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우이리가 되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고 성북구가 신설되어 성북구 우이동, 1973년 7월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신설되어 도봉구 우이동이 되었다. 1995년 3월 도봉구에서 강북구가 분리·신설되어 강북구 우이동이 되었다. 1995년 4월 쌍문동 일부가 우이동에 편입되었다. 우이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수유4동 관할 하에 있다.

참고문헌

『서울통계연보』(서울특별시, 2006)
『통계연보』(강북구청, 2005)
『서울민속대관』11(서울특별시, 1996)
『서울의 전래동명』(이재곤, 1994)
『서울민속대관』3(서울특별시, 1993)
『서울의 가로명연혁』(서울특별시, 1986)
『동명연서울특별시혁고』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4)
『서울의 전통문화』1, 2(서울특별시, 1982,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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