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과 남쪽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각각 강동구 · 송파구, 서쪽은 성동구 · 동대문구, 북쪽은 중랑구, 경기도 구리시와 접한다. 위치는 동경 127°03'~127°07', 북위 37°31'~37°34'이다. 면적은 17.06㎢이고, 인구는 36만 36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5개 행정동(7개 법정동)이 있고, 구청은 서울특별시 광진구 자양동에 있다.
동쪽 용마봉(龍馬峰)을 제일 높은 봉우리로 하는 아차산 줄기가 300m 정도의 높이를 이루고 있고, 대부분의 지역은 100m 높이 이하의 평야를 이루고 있다. 한강과 중랑천 등이 범람할 때 흙이 퇴적되어 이루어진 지역이다. 지질은 아차산 일대의 화강암(花崗岩) 및 편마암(片麻岩) 지대와, 자양동 한강변의 편마암 지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홍적층(洪積層) 즉 중랑천변과 광진구 중심부 일대이다. 충적층(沖積層) 지역은 한강변 일대이다.
해발 348m의 용마봉 봉우리에서 300m의 야트막한 아차산 봉우리들이 멀리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광주산맥(廣州山脈)의 끝을 이뤄 한강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모습이다. 서쪽은 경기도 의정부시 북쪽에서 흐르기 시작한 중랑천(中浪川)이 서울의 도봉구 · 노원구 · 중랑구를 거쳐 성동구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연평균 기온은 13.3°C, 1월 평균기온은 -1.5°C, 8월 평균기온은 26.1°C, 연 강수량은 1,499.1㎜이다.
광진구 일대에서 처음 생활한 조상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사람들이다. 일제강점기 자료에 따르면,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광진구 자양동 낙천정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지만, 본격적인 조사나 발굴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도시화가 진행되어 현재 그 유적의 실상은 알 수 없다. 청동기시대의 유물로는 아차산 줄기인 구의동 태봉에서 발견된 여러 종류의 토기, 그물추, 석기 등이 있다. 광진구 지역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각축을 벌이던 삼국시대이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475년에 한강 남쪽에 자리한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을 함락시킨 이래 신라 무열왕이 676년에 한반도를 통일할 때까지 200여 년 동안 이곳 장한성과 강 건너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한 넓은 산과 들은 신라, 고구려, 백제 세 나라가 서로 확보하려고 싸움을 벌이던 무대였다. 한강 일대를 차지한 신라는 경기도 남양의 당항성 해로(海路)를 개설하여 당나라와 직접 교류하였다.
940년(태조 23) 한양군을 양주(楊州)로, 한주를 광주(廣州)로 개편하여 광진구 지역은 양주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각 지방은 호족세력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양주 지방은 뚜렷한 호족세력이 나타나지 않던 곳으로 고려 태조 왕건에게 점령되어 고려왕조의 직할지가 되었다. 983년(성종 2) 양주를 양주목(楊州牧)으로 하고, 1067년(문종 21) 양주를 남경(南京)으로 승격시켰는데 이후 충렬왕 때까지 남경으로 하였다. 광진구 지역은 남경의 동남쪽 인근 지역으로 남경에 부속되었다. 고려시대에 백성들의 조용한 삶의 터였던 광진구 지역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이다.
조선 초기 광진구 지역은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古楊州面)에 속하였는데, 살곶이벌이라 부르는 광진구 대부분의 지역에 사복시(司僕寺) 직할 국립말목장인 살곶이 목장이 설치되었다. 또한 광진구 노유동과 성동구 성수동을 비롯한 한양 동쪽의 한적한 벌판은 왕실의 유명한 매 사냥터였다. 살곶이 목장은 조선 후기까지 운영되었으며, 화양정(華陽亭), 낙천정(樂天亭)을 지어 훈련을 참관하거나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1751년(영조 27) 현재의 광진구 자양동 및 성동구 성수동 일대가 한성부 남부(南部) 두모방(豆毛坊) 전곶일계(箭串一契)로 편입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경기도를 한성부로 개칭하여 한성부 양주군 소속이 되었으나, 1896년 1부 13도(道) 체제로 환원 개편되어 광진구 지역은 다시 경기도 양주군에 소속되었다. 국립목마장으로 국방의 중요한 역할을 하던 광진구 일대는 1904년(광무 4) 순종 황제의 비(妃) 순명황후의 능(陵) 유강원(裕康園, 후에 裕陵)이 조성되면서 능을 중심으로 자연 녹지와 한가한 농촌 지역으로 바뀌게 되었다.
1910년 10월 1일 한성부가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었으며, 광진구 지역은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으로 뚝섬에 면사무소를 설치하였다. 1914년 4월 1일 지방조직 개편으로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뚝도면(纛島面)이 되었으며, 1929년 6월에는 유릉 터(현 어린이대공원)에 경성골프구락부 군자리 골프장을 건설하였다. 1934년 12월 동대문∼광나루 간의 궤도차(軌道車)가 개통되었고, 1934년 10월에는 한강의 두 번째 다리인 광진교(廣津橋)가 준공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수차례의 대홍수로 한강이 범람하여 광진구 지역도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여전히 한적한 농촌에 머물렀다.
서울의 도시화가 점차 확장되자 1949년 8월 13일 성동구에 뚝도출장소가 설치되면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한국전쟁 기간 중에는 서울이 일시에 잿더미가 되면서 광진구 지역도 전쟁의 참화를 고스란히 겪었다. 이후 1960년대에 이르러 전쟁으로 인한 폐허를 복구하고 도시화의 진행이 가속화되었다. 1968년 1월 11일에 뚝도출장소를 폐지하고 관할구역이 성동구 직할로 편입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건설되어 사용되던 골프장은 1973년 정부가 어린이대공원으로 조성함으로써 매우 아름다운 휴식 공간을 가진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1980년대 이후로는 지하철 2·5·7호선 등이 속속 건설되고, 한강을 건너는 다섯 개의 큰 다리가 완비되는 등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으며, 동부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는 지역이 되었다. 1995년 3월 1일 성동구를 중랑천과 동이로를 경계로 하여 성동구와 광진구로 분할,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15개 행정동(7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차산(峨嵯山)에 있는 영화사(永華寺)는신라시대 672년(문무왕 12) 의상(義湘)이 창건했고, 당시에는 화양사(華陽寺)라고 불렀다. 이후 조선시대 1395년(태조 4)에 이 절의 등불이 궁궐에까지 비친다고 해서 절을 군자동으로 옮겼고, 그 뒤 다시 중곡동으로 옮겼다가 1907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절 이름을 영화사로 바꾸었다. 건물로는 극락보전과 대웅전 · 미륵전 · 선불장 · 삼성각 · 일주문 · 요사 등이 있고, 부설 건물로 유치원과 불교대학 등이 있으며, 유치원 아래에 지장전이 있다. 유물로는 미륵석불입상이 전한다. 높이 3.5m의 이 불상은 세조(1455∼1468)가 기도를 드린 불상이라고 하는데, 중곡동에서 옮겨온 것이다.
아차산성은 광장동과 구의동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1973년 5월 25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해발고도 200m 산정에서 시작해 동남쪽으로 한강을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진 산 중턱 위쪽을 둘러서, 둘레 약 1,000m 이상의 성벽이 구축되어 있으며 동쪽 · 서쪽 · 남쪽에 성문지(城門址)가 남아 있다. 산성의 형식은 테뫼식[鉢卷式]과 포곡식(包谷式)으로 보이고, 성벽구조는 삭토법(削土法)으로 대체의 형태를 축조한 뒤 성벽들이 무너져 토석혼축(土石混築)과 같은 모습이다. 성벽 높이는 외부에서 보면 평균 10m 정도 되며, 내부에서는 1∼2m이다. 아차산성은 백제 초기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신라와 고구려의 한강 유역 쟁탈전 때 싸움터가 된 삼국시대의 중요한 요새였다. 아차산 바위, 아차산 석탑, 아차산 옛무덤 등이 있다.
세종대학교박물관 내에는 1979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된 전 고종 익선관과 1976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전 왕비 당의 등을 비롯한 조선 후기 왕과 왕비가 사용했던 곤룡포와 대례복 등이 있다. 건국대학교내에는 도정궁 경원당이 있다. 이것은 구한말의 가옥으로 전형적인 평면형 한국주택의 양식을 따랐으나, 벽체와 창호(窓戶) 처리 등은 서양풍(西洋風)과 일본식의 절충이 가미된 것이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시기의 민속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도정궁 경원당은 1977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건국대학교박물관에는 『동국정운(東國正韻)』, 『율곡이이선생가분재기(栗谷李珥先生家分財記)』가 있다. 『동국정운』은 조선 세종 때 엮은 음운서(音韻書)로 한자음과 훈민정음 연구에 절대적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율곡이이선생가분재기』는 이이(李珥)의 남매들이 유산을 분배한 재산상속에 관한 고문서 1축으로 조선 전기 재산상속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구의동에는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예능보유자 김종희, 송파 다리밟기 기능보유자 한천복이 있고, 자양동에는 가사 예능보유자정경태가 있다. 2000년 4월 20일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된 초적(草笛)의 예능보유자 박찬범은 동백 · 유자 · 귤잎 · 상추잎 등으로 시나위 한 곡조를 뽑아낼 수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동네 노인잔치나 구청 문화축제 등에 초청받아 연주했지만, 1998년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협연을 갖는 등 국악계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종묘제례악은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고, 송파 다리밟기는 1989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가사는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중심부인 어린이대공원 주변은 학원 지구이고, 그 밖의 지역은 상업과 주택의 혼합 지구이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22개교, 중학교 12개교, 고등학교 9개교, 특수학교 1개교가 있다. 특히 대안학교로 광장동에 소재한 재한몽골학교와 중곡동에 위치한 광진도시속작은학교가 있으며, 야학으로는 동부밑거름학교가 있다. 건국대학교, 세종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등 6개교와 대학원 28개교를 비롯한 수준 높은 교육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한편 동부 여성발전문화센터는 여성들의 능력을 개발시키고, 삶의 질과 의식을 향상시켜 경제적 자립을 통한 실질적인 양성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시 동북부 지역 여성들의 교육, 문화, 정보 교류의 중심센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광진정보도서관이 있어 사회교육에 이바지하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공연장, 문화의 집, 전시관, 영화관, 도서관 등을 비롯하여 지역 문화예술의 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광진문화원이 있다. 구민회관 지하에는 수영장 및 헬스클럽, 1층에는 공원과 인접한 편의시설, 지상 층에는 청소년 및 주부들을 위한 멀티미디어실 및 문화교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다양한 공연이 가능한 다목적 대공연장과 소공연장, 상설전시실 등이 계획되어 광진구 예술문화회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1962년에 창설된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은 전통문화를 꽃피우는 동시에 동서 문화교류의 매체이자 예술의 전당으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건국대학교 새천년관, 세종대학교 대양홀, 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은 광진구에서 펼쳐지는 많은 문화예술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한편 여성합창단, 소년소녀합창단, 청소년합창단으로 구성된 구립예술공연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이 활동하고 있다. 영화관으로는 1998년 4월 최다 복수영화관(11관)으로 새로운 극장시대의 서막을 올린 CGV 강변11이 있는데, 최신영상 설비를 갖춘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심야관람 · 가족 관람 · 장애우를 위한 편의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다. 지역 언론매체로는 광진구보, 아차산메아리, 나루소식, 건강소식지, 광진전자북 등이 있다.
박물관으로는 세종대학교박물관과 건국대학교박물관이 있다. 세종대학교박물관에는 민속품, 목공예, 의상, 장신구, 도자기, 서화 등이 분류되어 전시되고 있으며, 특히 16점의 중요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가 있다. 건국대학교박물관은 1층에 설립자 유품 및 교사 자료가 전시된 상허기념전시실과 선사유물전시실이 있고, 2층에는 역사유물전시실이 있다. 역사유물전시실에는 1972년 국보로 지정된 『동국정운(東國正韻)』 6책 완질(完帙)과 1968년 보물로 지정된 『이이 남매 화회문기(李珥男妹和會文記)』를 포함하여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의 토기 · 와당 · 도자기 · 공예품 · 서화 · 전적 · 고문서 및 각종 민속자료 등 4천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관내 체육시설로는 구의동 아차산 배수지체육공원, 광장동 배드민턴전용체육관, 한강시민공원 뚝섬 지구, 중랑천 둔치 등을 갖추고 있다. 한강시민공원 뚝섬 지구와 중랑천 둔치는 육상트랙, 축구장, 배구장, 테니스장, 농구장의 시설을 갖춘 전용 체육시설이다. 특히 아차산 주변 일대와 중랑천 주변 일대는 자투리 공간을 이용한 체육시설이다. 또한 광진구청대강당과 문화원에서는 단전호흡을 실시하고 있다.
송파 다리밟기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쥐불놀이, 무등타기, 왕비행차 등의 의식을 하는 행사이다.
광진구에는 뱃길의 평안함과 홍수, 물귀신 등으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용제(龍祭)인 광나루 양진사(楊津祠)를 지냈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액운을 사라지게 하며 모든 일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한 동신제(洞神祭)를 지냈다. 광나루 양진사는 신라 때에 용에게 제사지내는 제룡단(祭龍壇)이 있던 곳으로서 원래 독단(瀆壇) 터가 있었다. 실제 이곳은 광장동 용당산(龍堂山) 위에 있으며 양진 곧 광나루의 위가 되므로 용왕제를 지내 광나루를 통해 오가는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고 용왕의 진노를 사지 않도록 제사를 지내고 제물을 바쳤던 곳이다.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는데 먼저 축문을 읽을 때 왕의 성과 이름을 일컫는다. 용신제는 광진교가 들어서고 이어 천호대교가 건설되면서 광나루가 뱃나루의 역할을 못하게 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1990년대 들어 옛 민속으로서의 의의를 살려 인근 주민들에 의해 복원되어 봄가을로 다시 용제를 드리게 되었다.
능동에서는 동신제를 ‘치성’이라고 부르는데 제사를 지내는 장소가 지금의 능동사무소 뒤에 위치한 ‘치성당’이라는 곳이다. 능동 치성당에는 특별한 사당은 없으나 수령이 약 500년쯤 되는 향나무 한 그루와 여러 그루의 오래된 느티나무들이 둘러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치성의 시기로는 봄과 가을의 춘제(春際), 추제(秋際)를 모두 행하였는데 요즈음도 음력 2월 초하루와 음력 10월 초하루에 마을의 제사를 지내는 풍습으로 전수되고 있다.
광장동에는 성황당이 있는데, 성황당에서의 굿과 제사가 끝나면 약 500m 떨어진 한강변 언덕에 있는 미륵당으로 옮겨 무당이 간단히 치성을 드리고 난 후 마을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치성을 드린다. 미륵당은 2∼3평 정도의 건물 안에 커다란 미륵불이 안치되어 있다. 현판(顯板)은 ‘상부관음전(上浮觀音殿)’이라 되어 있는데, 주민들은 보통 미륵당이라 부른다. 이 미륵불은 옛날 큰 홍수 때 상류로부터 떠내려 온 것을 모셔놓은 것이라 한다.
광나루, 능동, 화양동, 군자동 지역에는 지명과 관련된 유래나 설화가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아차산과 관련된 설화는 다음과 같다.
명종 때 홍계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점을 잘 쳐 이름이 온 나라 안에 퍼졌다. 명종은 나라 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를 궁으로 불렀다. “그대가 그리 점을 잘 치는가?”, “그러하옵니다.” 그러자 명종은 준비한 궤짝을 보이며 말했다. “그럼 이 안에 뭐가 있는지 맞춰 보거라. 맞추면 너의 소원을 들어 줄 것이고 틀리면 네 목을 벨 것이니라.” 홍계관은 말없이 궤짝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그는 입을 열었다. “쥐가 들어 있습니다.” 임금과 신하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하였다. “과연 용하구나. 그러면 몇 마리가 있느냐?” 질문을 받은 홍계관은 또 궤짝을 쳐다보았다. “세 마리이옵니다.” “허허, 그럼 그렇지 궤짝을 열어 보거라!” 궤짝을 열자 두 마리의 쥐가 웅크리고 있었다. “이럴 리가!” 놀란 홍계관은 꼼짝없이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다. 허나 그는 죽는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자기의 점이 틀린 것에 대한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그가 사형장로 끌려 갈 때였다. 명종은 가만히 있다가 외쳤다. “아차!” “여봐라! 쥐 두 마리 중 암놈의 배를 갈라 보아라.” 신하들이 분부대로 배를 갈랐는데 그 안에는 새끼 쥐 한 마리가 있었다. “이런,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 했다니… 여봐라 어서 가 사형 집행을 멈추게 하여 그를 이리 데려 오너라.” 같은 시간 홍계관은 죽기 직전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점을 쳤다. 그러자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는 칼을 든 집행관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청을 하였다. 죽기 전의 청이라 집행관도 들어 주었다. 이때 “어명이다! 기다려라!”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이 외쳤다. 그 소리는 정확하게 들리지 않아 집행관은 자기가 집행을 늦추고 있어 고함을 치는 줄 알고 그만 칼을 휘두르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 형 집행 장소의 위쪽 산을 아차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광진구의 전체면적은 17.06㎢로 이 중 32.14%가 공원녹지 지역이다. 상업지역은 1.16%, 66.70%가 주거지역으로 이루어졌다. 남쪽 한강변은 일제강점기부터 뚝섬유원지로 알려졌으며, 조선 태조 때부터 임금의 사냥터로 쓰였고 군사들의 무예를 점검하는 곳이었다. 1960년대 말까지 동대문에서 뚝섬유원지까지 기동차가 다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으며 일찍부터 주택지가 형성되었다. 강변북로 남쪽에는 한강시민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1960년대 이후 중소기업들이 많이 입주해 공업지대를 형성하였으며, 반면 동부지역인 자양동 · 구의동 일대에는 주택단지와 상가들이 들어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서울의 비약적인 도시 발달과 함께 건국대학교, 세종대학교 등이 세워진 것을 위시하여, 국제관광시설인 워커힐호텔이 개설되었다. 구의동에는 대규모의 수원지가 건설되었으며, 능동에는 어린이대공원이 조성되었다.
광진구는 역세권을 중심으로 화양 지구, 중곡 지구, 구의 지구, 건대 생활권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화양 지구는 청소년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숙박업 일색이던 화양 지구 일대도 변신하고 있다. 화양 지구(73,000여 평) 내 세종대학교 인근에는 이전 도깨비시장 자리에 1,700여 평 규모의 광진광장이 들어섰다. 건대 생활권은 건국대학교 부설 종합병원이 대지 5,000여 평, 연면적 25,000평에 지하 4층 지상 13층 규모로 지어졌고, 준주거 지역은 연면적 12만 6000여 평으로 주상복합 아파트와 상가가 들어서고 있다. 연면적 75,000여 평의 상업지역에는 백화점 및 실버텔을 건설 중이다.
예부터 영남로(嶺南路)의 나루였던 광나루(광장동)의 광진교를 비롯하여 천호대교 · 올림픽대교 · 잠실대교 · 잠실철교 등이 강동구 및 송파구와 연결되어 있어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목 구실을 하고 있다. 부도심지로 천호 · 잠실 · 영동 등으로 연결되는 요지이며, 서울 동부 외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지하철 2호선, 5호선, 7호선, 동서울터미널 등이 있다. 지하철 2호선 ·5호선과 천호대로가 동서로 가로지르고, 동이로 · 자양로 · 강변북로가 남북 방향으로 관통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동이로 · 자양로 · 강변북로가 중랑천길 · 천호대로 · 광나룻길 · 구의로 · 뚝섬길을 교차해 동부간선도로와 이어진다.
2호선은 1984년 5월 22일 성수역에서 성수역을 순환하는 전 구간이 개통되어 영동으로 연결이 용이해졌으며, 1996년 12월 5호선 여의도역∼왕십리역의 도심구간 13개 역이 개통됨으로써 광진구는 교통의 요충지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2000년 8월 1일 7호선 신풍역∼건대입구역의 15개 역 17㎞ 구간이 개통됨으로써 강북을 잇게 되었다.
풍부한 녹지 공간의 안정된 주거도시로 아차산 도시자연공원, 어린이대공원, 한강시민공원 등이 조성되어 있다. 아차산에는 삼국시대 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치열한 다툼이 있던 장소로 아차산성이 있었고, 고려 때 멋진 강변의 풍경을 갖고 있는 이곳에는 쌍수정(雙樹亭)이 세워지면서 광나루 강촌을 오르내리며 시심(詩心)을 돋울 수 있어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았다.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입구에 만남의 광장, 생태공원, 배드민턴장, 약수터, 놀이터 등이 단장되어 있고 연중무휴로 개방되고 있다. 또한 불도를 닦기 위한 도량(道場)으로 은석사(銀石寺) · 범굴사(梵窟寺) · 영화사(永華寺) 등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광장동에는 국제관광시설인 워커힐호텔이 있고, 구의동에는 대규모의 수원지가 건설되었으며 능동에는 어린이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어린이대공원은 꿈과 희망의 공간으로, 한강시민공원은 서울시민의 최대 휴식공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건국 로데오패션 거리는 60여 개의 유명 메이커 상설할인 의류매장 및 일반상가가 있고, 새로운 패션문화를 창출해 나가는 근원지로서 서울의 쇼핑명소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중곡동의 가구거리는 천호대로 변에 위치하고 있는 60여 개의 가구점 밀집지역으로 1995년 서울시에 의해 특화거리로 지정되어 광진구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혼수용 가구, 공예가구, 나전칠기, 부엌가구, 사무용가구, 인테리어, 수입가구 등 가구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다.
1998년 4월에 문을 연 테크노마트는 최첨단 전자, 전기 정보통신의 연구개발에서 제조 및 유통까지 그리고 풍요로운 문화공간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세계최첨단의 매머드 멀티센터이다.
1995년 청소년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윤락업소 단속이 시작되자 화양동의 카페골목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지하철 7호선 개통 후 유동인구 15만 명을 아우르는 지하철 2호선 건대입구역 2번 출구의 먹거리 노점상에는 젊은 손님들로 앉을 자리가 없다. 노룬산 골목시장, 영동교 골목시장, 자양 골목시장, 광성시장, 중곡 제일골목시장 등 15개의 민속시장이 있다.
아차산 해맞이축제는 서울에서 가장 먼저 해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매년 1월 1일에 새해소망 등을 비는 축제를 하고 있다. 아울러 아차산고구려축제, 아차산토요한마당축제, 구민의 날 한마음체육대회(5월 25일) 등이 다채롭게 열리고 있다.
광진구의 서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구의동, 서쪽은 성동구, 남쪽은 자양동, 북쪽은 군자동 · 능동과 접한다. 동의 이름은 조선시대 이곳에 세워진 화양정(華陽亭)에서 유래하였다. 세조에게 왕위를 내놓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귀양 갈 때, 이곳에서 부인 송씨와 이별하면서 회행(回行)하기를 기원했다고 하여 회행리(回行里)로도 불렸다. 1949년 성동구에 편입되어 이듬해 화양동으로 바뀐 뒤, 1995년 광진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광나룻길, 구의로, 동이로, 능동로가 동을 지나고, 지하철 2·7호선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광진구의 서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능동과 접해 있고, 서쪽은 용답동과 연해 있으며 남쪽은 송정동 · 화양동과 이웃해 있고 북쪽은 천호대로를 사이에 두고 중곡동과 동대문구 장안동, 중랑구 면목동과 이웃하여 있다.
동명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 어느 임금님 일행이 거동하다가 마침 이곳 동이로변(東二路邊: 남일농장터)에 묵게 되었는데, 그날 밤 동행했던 왕비가 옥동자를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임금의 아들을 낳은 곳이라 하여 이곳을 군자동이라 하였으며 지금도 이곳을 ‘명려궁터’라 부른다.
1949년 성동구에 편입되었고 1950년 군자동으로 바뀐 뒤, 1995년 광진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1970년대 초까지 중랑천을 끼고 배추밭과 판잣집이 즐비하던 교외지역이었는데 동이로와 천호대로가 개통되고, 구획정리사업이 전개됨으로써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였다. 중랑천 서쪽 천호대로변에는 상가가 형성되어 번화하며, 지하철 5·7호선이 지나고 있다. 중랑천 건너편에는 서울 중고 자동차 시장과 자동차 정비 단지가 있다.
광진구의 북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구의동, 경기도 구리시와 시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은 동대문구 장안동과 구계(區界)를 이루고, 남쪽은 군자동 · 능동 · 구의동과 이웃하고 북쪽은 중랑구 면목동과 구계(區界)를 이루고 있다. 동명은 능동과 면목동 중간에 있어 ‘가운데말’, ‘간뎃말’ 또는 한자음으로 중곡동(中谷洞)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1949년 성동구 중곡리로 되었으며, 1950년 중곡동으로 바뀌었다. 1973년과 1975년 구청 사이의 경계 조정으로 동 일부가 동대문구 면목동으로 바뀌었고, 면목동의 일부가 중곡동에 속하게 되었다. 1995년 광진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편입되었다. 동북쪽 산기슭은 개발제한구역이 많고, 해발고도 약 300m의 고산이 있어 주택가는 대부분 서쪽에 치우쳐 있다. 서쪽에는 중랑천이 흐르는데 중랑개, 한천, 송계천이라고도 하며, 청계천과 합류하여 옥수동에서 한강과 만난다. 1960년대 이후 인구 집중과 공장으로 인해 오염이 심해져 용답동에 중랑천 하수처리장을 건설하였다. 동부간선도로와 동이로가 있고, 능동로 밑으로는 지하철 7호선이 지난다. 이 지역은 광복 전에 백제고분 2기가 발굴되었으므로 갑분(甲墳) · 을분(乙墳)으로 명명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광진구의 중앙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구의동, 남쪽은 화양동, 서쪽은 군자동, 북쪽은 중곡동과 접하고 있다.
1904년(광무 8) 순명황후(純明皇后) 민씨(閔氏)의 유릉(裕陵)을 모셨으므로 능말 · 능리(陵里)라 하였으며, 마장(馬場)의 안쪽에 있다 하여 ‘장안말’, ‘안말’, 한자로 ‘장내리(場內里)’, ‘내리(內里)’라고 하였다. 1949년 성동구 능리로 바뀌었으며, 1950년 능동으로 되었다. 1995년 광진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편입되었다. 면적의 대부분을 어린이대공원이 차지하고 있어 수목이 울창하고 경관이 좋아 공원 북쪽에는 고급주택가가 형성되어 있다. 동의 북쪽에는 천호대로, 남쪽에는 광나룻길, 서쪽의 군자동 사이에는 능동로가 있고, 지하철 5·7호선이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현재 어린이대공원 터가 민씨 유릉이 있었던 곳이며, 공원 남동쪽에는 1975년 남산에서 이전해 온 어린이회관이 있다. 동쪽에는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이 세워져 초중등학생들의 민속예술단체가 입주해 있고, 이 단체를 항구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선화예술중고등학교가 1974년에 설립되었다.
광진구의 동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광장동과 접하고 서쪽은 능동 · 화양동과 연해 있고 남쪽은 자양동과 이웃하면서 한강으로 뻗어 있으며 북쪽은 아차산과 중곡동에 접해있다. 아차산 기슭에서 한강변에 이르는 긴 지형을 지닌 동의 이름은 자연마을인 양주군 고양주면(古楊州面)의 구정동(九井洞)의 ‘구’자와 산의동(山宜洞)의 ‘의’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의 구정동 · 산의동 · 율동이었다. 1949년 성동구 구의리가 되었으며, 1950년 구의동으로 바뀌었고, 1995년 광진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편입되었다. 천호대로, 광나룻길, 구의로가 동서로 지나가고, 천호대로 밑으로는 지하철 5호선이 지나며, 강변역 서쪽에는 동서울 종합터미널이 있다. 구의수원지가 있어 강북 지역에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태봉 근처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인 돌도끼, 무문토기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으며, 광진 전화국 뒤편 언덕에서는 고구려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아차산 아래의 절골로 불리는 곳에는 영화사(永華寺)라는 절이 있다.
광진구의 동쪽에 있는 동이다. 남동쪽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동구 천호동 · 풍납동과 마주하며, 서쪽은 구의동과 접하고, 북쪽은 아차산의 능선을 경계로 경기도 구리시와 이웃한다. 조선시대 자연마을인 광진리(廣津里)의 ‘광’자와 장의동(壯義洞)의 ‘장’자를 따서 동 이름을 만들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古楊州面) 장의동이었다. 1949년 성동구 광진리로 되었으며, 1950년 광장동으로 바뀌었고, 1995년 광진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편입되었다. 강변도로변에는 많은 아파트가 건립되어 있고, 천호대로와 구의로가 만나는 광장동 사거리는 교통 체증이 심한 곳이나, 지하철 5호선이 개통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1962년 아차산 중턱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쉐라톤워커힐호텔이 세워졌으며, 1996년 서울특별시에서 이 지역을 서울의 첫 온천 지구로 지정하였다. 1978년 호텔 아래 남쪽 기슭에 건립된 워커힐아파트는 동년 개최된 제24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의 선수촌으로 마련된 것으로 광진구에서는 가장 오래된 아파트이다. 광장동의 남쪽 광진교가 놓인 곳에는 광나루가 있었는데, 강폭이 넓은 곳에 나루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광진구의 남쪽 끝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구의동, 서쪽은 성수동과 접하고 남쪽은 한강과 연해 있으며 북쪽은 화양동과 이웃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곳에서 암말을 길렀기 때문에 자마장리(雌馬場里)라 한 것이 전음(轉音)이 되어 자양동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古楊州面) 자마장리 율동(栗洞)의 일부였던 것이, 1936년 자양리로 이름이 바뀌었고, 1949년 성동구 자양리로 편입되었다가, 1950년 자양동으로 바뀌었다. 1995년 광진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여 오늘에 이른다. 1972년 잠실대교가 건설됨으로써 천호동을 거치지 않고 경기도 광주시 · 성남시로 나갈 수 있게 되어 서울 동부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남쪽의 한강변에는 한강종합개발사업에 의해 한강시민공원이 조성되었고, 광진구청이 있다.
광진구의 남쪽에 있던 동이다. 남쪽으로 한강을 사이로 강남구 청담동과 마주하며, 동쪽의 화양동과 자양동, 북쪽의 송정동, 서쪽의 성수동1가와 접해 있었다. 노유산은 뚝섬 제방이 있기 전에는 잔디가 깔려 있어서 가을이면 금잔디로 변하여 누런 잔디산이라고 불리다가 누런산, 노룬산으로 변음되었다. 또한 뚝섬 나루터 일대와 한강의 풍치를 즐기려는 풍류객들은 이곳을 가리켜 늙어감을 서러워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하여 노유산(老遊山)이라도 했다. 따라서 동명은 노유산이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붙여졌다.
1949년 성동구에 편입되었고, 1950년부터 성수동이가로, 1995년 광진구가 신설되면서 노유동으로 바뀌었다. 남쪽의 한강변은 일제강점기부터 뚝섬유원지로 알려진 곳이고, 1960년대 말까지 동대문에서 뚝섬유원지까지 기동차가 다녀 사람들의 내왕이 많았으며, 일찍부터 주택지를 형성한 곳이다. 뚝섬 일대는 조선 태조 때부터 임금의 사냥터였고, 군사들의 무예를 점검하러 자주 들렀는데, 그때마다 국왕의 행차를 알리는 독기(纛旗)를 세웠다.
1980년대 초 한강종합개발사업에 의해 한강을 직강화(直江化)하면서 남쪽의 많은 부분이 잘려 나가고, 강변도로 남쪽에는 한강시민공원이 조성되었다. 2008년 자양동에 통합되어 노유동은 폐지되었다.
광진구의 동쪽에 있었던 동으로, 동쪽은 구의동, 서쪽은 화양동, 남쪽은 자양동, 북쪽은 능동과 접해 있었다. 모진이란 지명은 실족하여 수렁에 빠져 죽은 말을 여인들이 건져내어 그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 하여 인근 주민들이 이 여인들을 ‘모진 여인’이라 부르던 것이 ‘모진동네’로 바뀌었다는 동명 유래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당시 한성부 남서(南署) 두모방(豆毛坊) 즐곶계(櫛串契)였고, 대한제국 말기에는 두모방 즐곶계 장내능동(場內陵洞)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911년 4월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면서 경성부 두모면 장내능동이 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纛島面) 모진리가 되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성동구 뚝도출장소 모진리가 되었으며, 1950년 성동구 모진동이 되었다가, 1995년 3월 신설된 광진구에 편입되면서 광진구 모진동이 되었다. 1996년 12월 모진동 일부가 능동에 편입되었다. 2009년 화양동에 통합되면서 모진동은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