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구 ()

동대문구청
동대문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서울특별시의 동부에 위치한 구(區).
정의
서울특별시의 동부에 위치한 구(區).
개관

동쪽은 중랑천을 경계로 중랑구와 접하고, 서쪽은 성북구와 종로구, 남쪽은 성동구, 북쪽은 도봉구와 접해 있다. 위치는 동경 127°01′∼127°04′, 북위 37°33′∼37°35′이다. 면적은 14.21㎢, 인구는 36만 153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4개 행정동(10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다.

자연환경

배봉산(拜峰山)과 회기동 북쪽 산지는 쥐라기 대보화강암(大寶花崗巖) 또는 서울화강암과 제4기의 하성층(河成層: 강물에 운반된 모래나 자갈 등이 쌓여 이루어진 지층)으로 이루어진 잔구성 산지이다. 지질은 대부분 제4기 현세에 중랑천 범람으로 형성된 충적층이 동부 중랑천변을 따라 분포되어 있어, 제4기 홍적세에 한강 범람으로 인해 형성된 홍적층이 남부 장안동 일대에 소규모 분포되어 있다. 한편 하천 범람원에 해당하는 충적평야가 넓게 발달하여 시가지 발달과 교통중심지로서 유리한 지형조건을 가지고 있다.

전농동의 배봉산과 회기동 북쪽 산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지역이 100m 이하의 저지대를 이룬다. 대표적인 하천은 청계천과 중랑천이다. 청계천은 북악산 서쪽 계곡 지점에서 발원하여 서울을 관통해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이고, 중랑천은 의정부시 수락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성동구 장안교 부근에서 청계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유입된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를 바탕으로 도시 기후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연평균 기온은 13.3℃, 1월 평균기온 -0.4℃, 8월 평균기온 26.5℃, 연 강수량은 1212.3㎜이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를 바탕으로 도시 기후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역사

강 유역 평원지대의 천연적 생활터전을 바탕으로 동대문 지역은 일찍이 선사문화를 꽃피웠고 오늘날까지 주거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전농동에서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지금은 동대문구에서 분리된 면목동에서는 후기 구석기 유물이, 망우동·상봉동에서는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2세기경에 들어 북방 유이민의 흡수에 따라 마한(馬韓)의 목지국(目支國)을 비롯하여 백제국(伯濟國), 진한(辰韓)의 사로국(斯盧國), 변한(弁韓)의 구야국(狗耶國) 등 유력한 정치세력이 등장하였는데, 이 가운데 동대문구 지역과 관련되는 백제국은 마한 54개국의 하나로 북방 유이민들이 현 서울 지역인 한강 유역에 자리 잡은 군장사회로, 마한을 정복하고 초기 고대국가인 백제(百濟)로 발전하였다.

백제가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고대국가로 성장 발전함으로써 동대문구 일대는 백제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이들은 한강 유역의 경제성을 이용하여 보다 많은 생산활동과 인구의 증가에 따라 한반도 서남부 최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한군현(漢郡縣)의 세력인 낙랑군(樂浪郡)과 교류하며 선진문화를 받아들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관계에 들어갔으며, 백제는 한강 이남으로 도읍을 옮겼다. 동대문구 지역의 위치는 한강 이북에서 백제 세력의 낙랑 지역 진출과 방어에 길목 역할을 하였으며, 4세기 중엽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전성기를 이루었다.

475년 백제는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내주고 웅진(雄鎭)으로 천도하였고, 향후 77년간 동대문구를 포함한 서울 지역은 고구려의 통치 하에 들어갔으나, 553년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독점함으로써 이 지역의 새로운 패자가 되었다. 이후 한강 유역은 신라 삼국통일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면서 동대문구를 포함한 서울 지역을 한산주(漢山州)로 편입시켰다. 757년(경덕왕 16)에는 한산주가 한주(漢州)로 개칭되었고, 서울 지역에는 한양군(漢陽郡)이 설치되었으며, 후삼국시대에는 태봉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918년 왕건(王建)이 고려왕조를 개창함에 따라 한양군은 고려에 편입되었으며, 940년(태조 23)에는 전국의 행정구역이 재편성되고 군현호(郡縣號)가 개칭됨에 따라 한양군은 양주(楊州), 한주는 광주(廣州)로 개편되었다.

동대문구를 포함한 서울 지역은 대체로 정종(1035∼1046) 때까지 양주, 문종 이후 충렬왕(1275∼1308) 때까지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 한양부(漢陽府)로 불렸다. 즉 한양부는 고양(高陽)·양주(楊州)·포천(抱川) 등 현재 한강 이북 서울 지역과 그 주변 일대를 포괄하게 되었다. 이후 공민왕 5년(1356)에 이르러 다시 한양부가 남경으로 환원되었지만, 또다시 양주부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공양왕 3년(1391) 한양 천도가 이루어졌다. 서울 지역은 조선왕조가 개창되어 수도로서 한성부(漢城府)가 되기까지 한양부로 존속되었다.

한양 천도가 실현되고 도성이 축조됨으로써 동대문구 지역은 수도 한성부의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에 편입되었다. 약 18㎞의 도성 수축과 더불어 4대문 가운데 하나인 흥인문(興仁門) 즉 동대문(東大門)이 건립됨으로써 도성 동쪽 지역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이 설치되었다.

1867년(고종 4) 한성부는 5부 47방 340계로 분할되었다. 이때 동대문구 지역은 동부 숭신방의 일부와 인창방에 해당되었는데, 이때 숭신방에는 숭신동계(崇信洞契)·월곡리계(月谷里契)·사아리계(沙阿里契)·안암동계(安岩洞契)·종암동계(鐘岩洞契)·장위리계(長位里契)·능동계(陵洞契)·수유촌계(水逾村契)·가오리계(加五里契)·우이리계(牛耳里契)·어창계(御倉契)·신설계(新設契)·벌리계(伐里契) 등이 있었고, 인창방에는 인창동계(仁昌洞契)·왕십리일계(往十里一契)·이계(二契), 사계(私契), 마장리계(馬場里契)·답십리계(踏十里契)·중랑상리계(中浪上里契)·중랑하리계(中浪下里契)·청량리계(淸凉里契)·전농리계(典農里契)·제기리계(祭基里契) 등이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에는 한성부 5부를 5서로 고치고, 계를 줄이는 대신 동(洞)을 새로이 두어 47방 228계 775동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동대문구 지역은 동서 숭신방 동문외계(東門外契)와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인창방 동문외계, 동소문외계·왕십리계 지역에 해당되었다.

농정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 경제체제에서 왕이 풍작을 기원하는 제단으로서 선농단(先農壇)이 설치되어 선농제(先農祭)를 국왕이 행하는 등 동대문구 지역은 상징적으로 봉건국가 경제를 선도하는 지역이었다.

아울러 동대문을 지나 원산시(元山市)·경흥(慶興)에 이르는 서울 동북방의 간선도로가 이 지역을 관통하고 있어, 조선 동북방의 물산이 한성에 집결하는 통로가 되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 들어서 사상(私商)이 발달하고 누원점(樓院店)의 도매와 이현시장(梨峴市場)이 연결되는 등 상업활동의 중심지역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보제원(普濟院) 등이 있어 역원(驛院)의 기능, 노인 위로잔치와 빈민 구휼 및 환자 치료를 위한 진제장(賑濟場)으로도 운영되었다. 장안평(長安坪)에는 국립목장이 있어 왕실의 사냥터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왕실의 능묘 지역으로 주목받아 홍릉(洪陵)·영휘원(永徽園)·숭인원(崇仁園)·휘경원(徽慶園) 등이 자리 잡기도 하였으며, ‘흥인문외양류(興仁門外楊柳: 흥인문 밖의 버들)’라는 풍류가 곁들여져 주민들의 휴식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식민지 시기인 1914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경성부 8면 중에서 일부는 경성부로 편입되었고 6개 면은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되었다. 숭인면은 휘경원·답십리·전농리·청량리·회기리·병점리·장위리·석환리·상월곡리·하월곡리·제기리·용두리 등 12개 리로 형성되었다. 1936년 4월 1일을 기하여 경성부는 행정구역을 약 4배로 확장하자 인구가 증가하게 되었다.

일제는 고양군의 숭인면을 경성부에 편입하면서 동 명칭을 일본식인 정(町)으로 바꾸었고 동부출장소를 두어 그 관내에 속하도록 하였다. 당시 고양군 관내에서 편입된 지역은 안암리·성북리·신설리·종암리·돈암리·답십리·전농리·청량리·회기리·휘경리·이문리·제기리·용두리 등이었다.

1943년 구제(區制) 실시로 동부출장소에 동대문구역소와 성동구역소가 설치되어 종전의 마을이 동대문구에 속하게 되었다. 아시아 대륙으로 군수물자와 군대를 수송해야 했던 일본은 중앙선을 개통하였고, 청량리역의 역할은 확대되었다.

광복 후인 1946년 경성부가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되고 일제식 동명이 동(洞)·로(路)·가(街)로 개정되었으며, 1949년 성북구가 신설됨에 따라 동대문구의 관할구역은 축소되었다.

이후 1963년 서울시 구역 확장, 1975년 구역 변경에 따라 동대문구의 창신동·숭인동·신설동 일부가 종로구에 편입되었고, 면목동·용두동·답십리동 일부가 성동구에, 보문동·신설동이 성북구에, 성동구의 중곡동·능동·군자동 각 일부와 성북구의 종암동·안암동·석관동 등 일부가 동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88년 인구가 76만 명이 넘는 구의 구획이 재조정되었는데, 이 때 신설동·용두동·제기동·신내동은 신설된 중랑구의 관할이 되었다. 이로써 동대문구는 신설동·용두동·제기동·전농동·답십리동·장안동·회기동·청량리동·휘경동·이문동 등 10개 동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유물·유적

동대문구 제기동에 위치한 서울 선농단(사적, 2001년 지정)은 조선 초부터 농업과 관련 있는 고대 중국의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매년 선농제를 지내던 제단이다. 예조에서 경칩 후 길한 해일을 골라 제일을 정하면 임금은 3일 전부터 재계하고 당일 새벽에 이곳에서 여러 중신 및 백성들이 참가한 가운데 제를 올렸다.

또한 이곳에 조선 초기 선농단을 축조할 당시 심어진 것으로 보이는 서울 선농단 향나무(천연기념물, 1972년 지정)가 있다.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위치한 영휘원과 숭인원(사적, 1991년 지정)에는 고종의 후궁 순헌귀비(純獻貴妃) 엄씨의 묘와 손자인 이진(李晋)의 묘소 숭인원(崇仁園)이 있다.

그리고 세종대왕기념관에는 세종대왕 신도비와 구 영릉석물(舊寧陵石物) 12기가 있으며, 하천의 범람을 미리 예고하였던 서울 청계천 수표(보물, 1985년 지정)가 있다. 또한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언해) 권7~8, 9~10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諺解)』권7~10(보물, 1984년 지정),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권1, 5(보물, 1984년 지정),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蒙山和尙法語略錄(諺解)』(보물, 1984년 지정) 등도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이문동에는 송파 산대놀이(국가무형문화재, 1973년 지정)와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국가무형문화재, 1985년 지정)이 전해지는데, 송파산대놀이는 서울·경기 지방에서 즐겼던 산대도감극의 한 갈래로 춤과 무언극, 덕담과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 놀이이다. 매년 정월 대보름과 단오·백중·추석에 명절놀이로 공연되었다.

교육·문화

교육기관으로 2015년 현재 초등학교 21개교, 중학교 15개교, 고등학교 11개교가 있다. 대학으로는 경희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 삼육간호전문대학이 있으며, 이밖에 국제요리전문학교, 강북IT직업전문학교, 한국항공직업전문학교 등의 직업전문학교가 있다.

한편, 과학기술 발전에 필요한 고급인재를 양성하고 기초 및 첨단과학을 연구하는 한국과학기술원과 경제발전 및 사회 발전에 관련된 사항을 조사·연구하는 정부 출연 연구기관인 한국국방연구원이 있다.

이와 함께 임업연구원, 한국개발연구원, 산업연구원, 북한연구소,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등 다양한 연구기관이 소재하고 있다. 특히 임업연구원의 전문 수목원인 홍릉수목원은 국내외의 다양한 식물 유전자원을 체계적으로 수집·관리하여 기초 식물 학문분야 발전은 물론 식물 유전자원 확보를 위해 조성한 시험 연구림이다. 특히 초·중·고등학생들의 자연생태학습장으로 유명하다. 또한 동대문도서관, 동부등록문, 구립청소년독서실 등이 있어 사회교육에 이바지하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공연장, 문화의 집, 전시관, 영화관, 도서관 등을 비롯하여 지역 문화 예술의 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동대문문화원, 동대문구문화회관이 있다. 구민회관 내 대강당은 종합공연장 구실을 하며 문화영화 상영, 예술 공연 및 학예 발표회 등 지역특성에 맞는 문화예술 프로그램 개발과 유치 활성화를 담당하고 있다.

동대문구의 대표적인 전시관 겸 박물관 기능을 하는 곳은 세종대왕기념관과 산림과학관이다. 세종대왕기념관은 세종의 여러 문화적 업적과 역사를 접하고 학습할 수 있는 곳이며, 산림과학관은 지구환경을 지켜 나갈 산림의 가치와 임업·임산업에 관한 홍보 및 교육을 위해 홍릉수목원 내에 개관하였다.

한편 배봉산 등에 각종 체육시설을 정비하여 공간을 확보하였고, 장안근린공원 내에 수영장·태권도장·탁구장·체육관·유도장·소강당·편의시설 등 다양한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동대문구민체육센터를 1990년에 완공하였다. 아울러 장안 종합사회복지관, 동대문 종합사회복지관 등에서 시민들의 생활체육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시설을 바탕으로 동대문구 생활체육협의회가 조직되어 생활체육 동호인 및 단체 육성과 체육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민속

답십리동과 전농동에서는 10월 초 동신제를 올린다. 아울러 해마다 경칩 후 첫 해일(亥日)이 되면 흥인문 밖 선농단(현재 제기동 소재)에서 국왕이 친히 행차하여 한해 농사가 풍년이 되기를 기원하는 선농제를 올렸다. 1999년부터는 동대문구와 농림부, 동대문 문화원 공동 주관으로 곡우일인 4월 20일에 선농제를 지내고 있다.

민속놀이를 계절로 보면 정초 놀이로 널뛰기, 윷놀이, 연날리기, 승경놀이, 돈치기 등이 있었으며, 15일에는 달맞이, 쥐불놀이 등이 있었다. 4월 초파일에는 연등행사가 있었고, 5월에는 그네뛰기, 7월 백중일에는 씨름대회가 열렸으며, 8월 추석에는 종지놀이 등이 있었다.

동제당(洞祭堂)은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며 국가의 안위를 축원하는 데 목적이 있다. 동대문구에서는 답십리동과 전농동만이 동제당이 전승되어 오고 있다. 답십리동의 경우 유례식(儒禮式)과 무속식(巫俗式)을 병행하고 전농동의 경우는 유례식으로 의식을 각각 전하고 있다. 휘경동의 산제당(山祭堂)은 1963년부터 지내고 있다.

전농동과 용두동은 조선시대 임금이 백성들의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친히 제사를 지내고 밭을 갈던 동적전(東籍田)이 있던 곳이다. 1475년(성종 6) 왕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 후 월산대군(月山大君)을 비롯한 종친과 신하들, 백성들과 함께 밭을 갈고 나서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소머리 내장 등을 넣고 소금과 고춧가루를 사용해 국밥을 끊였다. 이 국밥을 선농단(先農壇)에서 끓였다 하여 ‘선농탕’이라 하였는데, 오늘날의 ‘설렁탕’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현재의 신설동과 보문동 사이에 걸쳐 있던 마을인 우산각(雨傘閣)골에, 조선의 개국공신 유관(柳寬)이 살면서 비 새는 집에서 우산을 받치고 책을 보았다고 전하는 데서 유래한 우선동과 배봉산 아래 순조의 생모 수빈(綏嬪) 박씨의 묘 휘경원(徽慶園)이 자리한 것에서 유래한 휘경동 등 지명의 유래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산업·교통

동대문구의 전체 면적은 14.21㎢로 이 중 0.86%가 녹지지역이다. 상업지역은 6.80%에 불과하고 92.34%가 주거지역으로 이루어진 인구 밀집 지역이다.

동대문구는 조선시대 한성부 도성 동쪽에 위치한 비옥한 농경지와 교통의 요충지로 서울의 동부에서 가장 활발한 상거래가 이루어졌던 곳이다. 조선 후기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용두동 일대에는 주막거리가 번창하였고 아울러 객주·거간들이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까지 동대문구 지역의 상업은 보잘 것 없었다. 제조업체로는 1940년경 일제강점기 때 동대문 지역에는 최대 시설 규모의 신설동 소재 종방(鐘紡) 동대문시장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청량리역과 성동역을 거점으로 동부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해 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맞추어 현재 이 지역에는 한국과학기술원, 산업연구원 등 8개 전문 연구시설과, 경희대·한국외국어대·서울시립대 등 교육·연구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한약 거래의 중심지로 서울 약령시의 경우 전국 거래량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대형 백화점을 비롯한 상업지구가 형성되어 있고, 특히 서쪽의 경동시장(京東市場)은 농산물의 도매시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중심 시가지인 청량리 로터리는 고층건물이 즐비하여 번화가를 이루며, 상업의 업종별 구성도 서비스업·귀금속 및 고급품 소매점·양화점·양품점 등으로 부도심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아울러 제기동 어항거리, 답십리 철물거리, 답십리 자동차 부품 종합상가 등은 서울, 경기 등 중부 이북 지방 상거래의 약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전문적이고 특색 있는 시장이다.

왕산로, 망우로 등은 간선도로가 위치한 동부서울의 관문이며, 1974년 8월 15일에 개통된 청량리역은 지하철 1호선의 기점으로 지하철과 각 철도 및 여러 버스 노선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어 교통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크다. 또한 동대문역은 지하철 1호선과 4호선이 교차하고 있으며, 신설동역은 잠실을 연결하는 지하철 2호선이 연결되어 강남으로의 교통을 원활하게 하고 있다. 한편, 2017년 9월에 개통된 경전철 우이신설선이 동대문구를 관통하고 있다.

관광

동대문구는 조선시대 한성부 도성 동쪽에 위치한 비옥한 농경지와 교통의 요충지로, 국왕의 친경지였던 적전과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는 선농단, 세종대왕을 기리는 세종대왕기념관의 각종 문화재 등 역사의 향기가 어린 지역이다.

오늘날 동대문구는 그렇게 넓지 않으나 동쪽에는 이문(里門)의 옛 유적 터가 있고 사도세자의 처음 무덤 터였던 배봉산이 있다. 홍릉의 울창한 숲과 연화사·청량사 등 조선시대 유물·유적들이 많이 있어 관광객이 찾고 있다.

또한 답십리 고미술상가는 골동품점, 도자기점 등이 즐비하여 거리 자체가 살아있는 문화재이며 박물관이다. 그리고 제기동 어항거리, 답십리 철물거리, 답십리 자동차 부품 종합상가 등의 전문시장과 경동시장·약령시장·청량리시장 등 전문성을 갖춘 시장들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청량리시장과 경동시장은 1930년대 중반까지 청량리역전에 소규모의 상설시장과 몇 개의 점포가 있었고, 성동역을 기점으로 경동시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청량리시장은 1990년대 들어 서울시내에서도 대규모 재래시장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경동시장은 현재 한약의 도·소매시장으로 유명하다. 아울러 구의 면적은 넓지 않지만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기 때문에 서울약령시장·제기시장·전농종합시장·동부시장·휘경시장 등 21개의 민속시장이 분포하고 있다.

선농제향은 가장 대표적인 전통 제례 행사로 어가행렬 재연, 선농제향, 전통 설렁탕 재연 등을 선보인다. 1992년부터는 동대문구를 중심으로 농림부와 동대문문화원, 선농제향보존 위원회가 공동 주관하면서 국가 행사로 발전하여 매년 4월 20일(곡우날) 선농단에서 선농제향을 재연하고 있다.

청룡문화제는 매년 10월 용두초등학교에서 열리는데, 조선시대 임금이 기우제를 지내던 ‘동방청룡제’를 계승한 것으로 어가행렬, 동방청룡제례, 전통 민속놀이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동대문구민의 날 축제는 구민이 하나 되는 참여와 화합의 장으로 구청 광장 및 구민회관 운동장에서 동대문구민상 수상식, 구민체육대회, 국악한마당, 노래자랑 등 다양한 문화 체육행사가 열리며, 서울약령시의 날 축제는 흥겨운 사물놀이 공연을 시작으로 무료 진료 및 각종 한약재 전시, 약효설명회, 건강 마라톤 대회 등이 다채롭게 열린다.

동(洞)
  1. 신설동(新設洞)

동대문구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종로구 숭인동, 서쪽은 용두동, 남쪽은 성동구 상왕십리동, 북쪽은 용두동과 성북구 안암동이 접해 있다. 조선시대 동부숭신방(東部崇信坊)에 새로 설치한 마을이라 하여 신설계(新設契)라 한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신설동은 새로 마을이 만들어졌다 하여 ‘새말’ 또는 ‘신리(新里)’라고 하였다. 1943년 동대문구에 속하였고, 1946년 신설동으로 바뀌었다. 왕산로, 하정로가 교차하는 신설동 로터리가 있고, 청계천로가 지나며, 지하철 1호선과 2호선을 연결하는 신설동역이 있어 교통의 요지이다. 공공시설로는 동부교육지원청, 동대문도서관, 동대문우체국, 동대문등기소, 성북수도사업소 등과 우산각 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1. 용두동(龍頭洞)

동대문구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신설동, 서쪽은 답십리동, 남쪽은 성동구 마장동·상왕십리동, 북쪽은 제기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모습이 용(龍)의 머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43년 동대문구 관할이었다가 1946년 용두동으로 바뀌었다. 왕산로·하정로·청계천로가 시작되는 곳이며, 남북으로 고산자로가 지나고, 지하철 1호선 제기역이 있다. 청량리 청과물시장, 수산업협동조합 서울공판장, 건설자재시험소, 한국직업관리공단, 폐차부품상가, 용두시장 등이 있고, 동대문구청, 한의약 전시관·문화관, 용두근린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1992년부터 동대문구청에서 권농일 직전의 일요일을 구민의 날로 정하고 선농제를 지내고 있다.

  1. 제기동(祭器洞)

동대문구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청량리동, 서쪽은 안암동, 남쪽은 용두동, 북쪽은 성북구 종암동과 접해 있다. 조선시대 국왕이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마을의 친경대(親耕臺), 즉 선농단을 만들어 친히 제사를 지내던 자리로 ‘제터’라고 부르던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3년 동대문구에 편입된 뒤 1946년 제기동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는 토지가 비옥하고 야채와 토란 산지로 유명하였다. 지금도 경동시장에는 각 지방에서 들어오는 토산품 시장으로 성시를 이룬다. 경동시장 일대는 미나리 밭으로서 ‘미나리꽝’으로 불렸으나 1946년 용산에 있던 나무시장(나뭇장)이 이곳으로 옮겨와 원목 조합이 형성되어 ‘원목 조합 터’라고도 하였다.

고산자로 주변에는 많은 시장과 상가가 형성되어 있고, 북쪽 지역은 주택가이다. 또한 전국 한약재의 70%가 유통되고 있는 경동약령시(京東藥令市)와 그 외 경동시장, 청량리시장, 동서시장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1977년 지정)가 있었는데 1996년에 조성된 남산한옥마을(중구 필동)로 옮겨졌다.

  1. 전농동(典農洞)

동대문구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답십리, 서쪽은 중구 신당동, 남쪽은 성동구 마장동, 북쪽은 신설동과 접해있다. 조선시대 왕의 친경지(親耕地)였던, 전농(典農)이라고도 하는 적전(籍田)이 있었던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3년 동대문구에 속해 있다가 1946년 전농동으로 바뀌었다. 서울 동부지역 철도교통의 관문인 청량리역(淸凉里驛)이 있으며, 배봉산(拜峰山) 아래 서울시립대학교와 배봉산근린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1. 답십리동(踏十里洞)

동대문구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장안동, 서쪽은 마장동·제기동, 남쪽은 천호대로를 경계로 한 용답동과 군자동, 북쪽은 전농동·청량리동이 접해 있다. 조선 초기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왕도를 정하려고 이곳을 밟았다 하여 동명을 ‘답심리(踏尋里)’라 했다는 구전이 있으며, 동대문으로부터 10리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왕십리와 같이 답십리라는 동명이 붙여진 것이고도 한다.

1943년 동대문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답십리동으로 바뀌었다. 한국전쟁 이후부터 농업은 인구 집중 현상에 따라 점차 사라지고 현재는 도로변에 상가지역이, 그 밖의 지역은 대부분 주택가가 자리잡고 있다.

현재 답십리 지역엔 자동차 부품상가, 고미술상가 등 특화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답십리근린공원, 간데메공원, 동대문문화회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천호대로변에는 상공회의소 동부지소, 농수산물 종합직매장, 동부시장 등이 있다.

  1. 장안동(長安洞)

동대문구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성동구 중곡동, 서쪽은 답십리동, 남쪽은 성동구 군자동, 북쪽은 전농동과 중랑구 면목동과 접해 있다. 조선시대 목마장(牧馬場)으로 유명했던 ‘장안벌’, 즉 ‘장안평(長安坪)’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75년 성동구 중곡동과 군자동 일부를 합해 신설된 동으로서 역사가 짧다.

목마장을 농토로 일구기 시작하면서 농토가 비옥해지자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소속되었다.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신한공사의 관리에 들어갔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농지개혁으로 실제 경작자들에게 분배되었다. 그 후 동대문구 지역에 인구 집중 현상이 나타나자 1975년부터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실시하여 농지에서 주택지로 전환되었다.

천호대로, 한천로, 장안로, 사가정 길 외에도 중랑천을 따라 도로를 개설해 교통이 편리하다. 천호대로 건너편에는 서울중고자동차시장이 있어 대로변은 번화한 상가를 이룬다. 장한로변에는 호텔과 유흥업소가 밀집해 있다. 그 밖에 동대문소방서, 국립농산물검사소, 북한연구소 동대문구민회관, 동대문구민체육센터가 자리하고 있으며, 장안근린공원, 장평근린공원 등이 있다.

  1. 청량리동(淸凉里洞)

동대문구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휘경동, 남쪽은 전농동, 서쪽은 제기동, 북쪽은 회기동과 성북구 종암동에 접해 있다.

청량사(淸凉寺)라는 사찰이 있는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3년 동대문구에 속한 뒤, 1946년 청량리동으로 바뀌었다. 청량리1동은 청량리 로터리 부근으로 한림대학교 부속 동산병원, 청량리세무서, 청량리정신병원 등이 있고, 청량리2동에는 산림청, 임업연구원, 동대문경찰서, 세종대왕기념관, 영휘원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의 능지(陵址)인 홍릉(洪陵)이 있었으며, 엄비(嚴妃)의 능인 영휘원(永徽園), 순종(純宗)의 왕세손이었던 이진(李辰)의 묘소인 숭인원(崇仁園)이 있다. 세종대왕기념관에는 세종대왕 신도비, 청계천 수표 등 다수의 유물이 있다.

청량리 관내에는 동대문경찰서, 동대문세무서, 청량리전화국, 청량리정신병원, 산림청 등 공공기관과 산업연구원, 산업기술정보원, 국방연구원, 임업연구원, 한국개발연구원, 한국과학기술원, 한국농촌경제연구소 등 각종 연구기관이 있다.

  1. 회기동(回基洞)

동대문구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과 남쪽은 청량리동, 서쪽은 휘경동, 북쪽은 이문동과 접해 있다. 조선시대 연산군의 생모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묘소인 회묘(懷墓: 현 西三陵 경내 이장)가 있어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3년 동대문구에 속한 뒤, 1946년 회기동으로 바뀌었다. 남동쪽으로 망우로와 이문로가 지나고, 회기로가 동서로 관통하며, 지하철 1호선인 회기역이 있다. 경희대학교와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있다.

천장산(天藏山) 남쪽 기슭에 자리한 연화사(蓮花寺)는 석관동에 있는 경종과 계비 단의왕후(端懿王后)의 능인 의릉(懿陵)의 원찰(願刹)이다. 연화사 옆으로 경희대학교와 경희의료원이 자리하고 있다.

  1. 휘경동(徽慶洞)

동대문구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회기동·이문동, 서쪽은 중랑구 면목동, 남쪽은 전농동, 북쪽은 이문동과 접해 있다. 조선시대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묘소인 휘경원(徽慶園: 西三陵 이장)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망우로, 이문로, 한천로, 중랑천 고수부지에 동부고속화도로가 있고, 전철역인 회기역과 휘경역이 있다. 건설공무원교육원, 국립건설시험소, 서울위생병원, 국립농업자재검사소, 축산진흥원 등이 있고, 삼육간호보건대학이 있다.

  1. 이문동(里門洞)

동대문구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중랑천(中浪川)을 사이에 두고 중랑구 면목동과 이웃하고, 서쪽은 회기동, 남쪽은 휘경동, 북쪽은 성북구 석관동과 접해 있다. 마을에 도둑을 지키는 이문(里門)이 있어, 우리말로 ‘이문골’, ‘이문안’이라고 불리던 것을 한자로 ‘이문동(里門洞)’이라 한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3년 동대문구에 속한 뒤, 1946년 이문동으로 바뀌었다. 1975년 성북구 석관동 일부가 이문2동에 편입되었다. 서쪽에 이문로, 중랑천변에는 한천로가 동부고속화도로와 연결되어 있고, 경원선이 지나는 외대역과 신이문역이 있다.

천장산 기슭에는 태고종 삼홍사(三弘寺)가 있고, 현재 이문동 관내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와 한국철도공사 수도권북부지사 이문차량사업소가 위치하고 있다.

구의 중심지는 청량리 일대로서 청량리역을 중심으로 한 일대는 상업기능이 집중해 있는 부도심의 한 곳이다. 유적으로는 김병로 묘(金炳魯墓), 한용운 묘(韓龍雲墓), 안창호 묘(安昌浩墓), 오세창 묘(吳世昌墓) 등이 있다.

참고문헌

『서울통계연보』(서울특별시도봉구, 2006)
『통계연보』(동대문구청, 2005)
『서울민속대관』11 종교편(서울특별시, 1996)
『서울의 전래동명』(이재곤, 1994)
『서울민속대관』3 세시풍속과 놀이편(서울특별시, 1993)
『서울민속대관』1 민간신앙편(서울특별시, 1990)
『서울의 가로명연혁』(서울특별시, 1986)
『서울의 전통문화』2(서울특별시, 1986)
『동명연혁고』Ⅸ도봉구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4)
『서울의 전통문화』1(서울특별시, 1982)
동대문구(www.ddm.go.kr)
관련 미디어 (2)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