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후옥(厚玉), 호는 구옹(癯翁).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의 5대손이며, 이상주(李相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영(李泳)이고, 아버지는 참판 이명희(李命熙)이며, 어머니는 한제유(韓濟愈)의 딸이다.
1726년(영조 2)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뒤 문음으로 목사가 되고, 1750년 56세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그 해에 호남균전세사(湖南均田稅使)가 되어 세정(稅政)에 참여하였다.
이어 승지에 올라 대전(大錢)의 주조를 청하였으며,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호남균세사가 되어, 호남의 해도(海島)에는 범죄자와 사노(私奴)로서 도주해온 자가 많으며, 이들의 생활은 육지보다 풍족함에도 수세(收稅)가 적다는 도서의 실상을 보고하였다.
이어 대사간을 거쳐 1752년 동의금이 된 뒤 한성부우윤·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755년 이조참판으로 지경연사를 겸하였으며, 이어 형조판서·병조판서·우빈객을 역임하였다.
1758년 이조판서 때 김상로(金尙魯)를 천거하였던 문제로 평안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가 그 해에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약방도제조(藥房都提調)를 겸하였는데 이 때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질환치료에 정성을 다하였다.
1760년 좌의정으로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으며, 이듬해 세자의 평양원유사건(平壤遠遊事件)을 비롯하여 유언비어가 심한 데 대한 왕의 추궁을 받자, 그에 책임을 느낀 나머지 이천보(李天輔)·민백상(閔百祥) 등과 음독자살하였다. 시호는 정익(定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