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조선 후기, 조식 학문인 남명학의 중심지인 삼가(三嘉)〔지금의 경남 합천〕에서 활동하던 문인 학자.
가계 및 인적사항
주요활동
임진왜란으로 피난을 갔다가 43세인 1599년(선조 32) 봄에 고향인 합천 대평리(大坪里) 회향촌(回鄕村)에 돌아와 희정당(喜靜堂)을 지었다. 44세인 1600년(선조 33) 여름에 남산 아래에 죽정(竹亭)을 지어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해에 노흠이 임곡(林谷) 임진부(林眞怤)와 창주(滄洲) 허돈(許燉)을 그에게 보내서 배우게 하였다. 45세인 1601년에는 비암서당(鼻巖書堂)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58세인 1614년(광해 6)에는 아들 회일(會一)에게 명하여 동계(桐溪) 정온(鄭蘊)을 변호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62세인 1618년(광해 10)에 큰아들과 맏사위 매죽헌(梅竹軒) 성박(成鑮)이 죽고, 65세인 1621년에 둘째 아들까지 죽자 크게 상심하여 더 깊은 자연, 즉 합천군 봉산면 노파(蘆坡)로 거처를 옮겼다. 현재 이곳은 1987년에 합천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었다. 68세인 1624년에 합천 삼산(三山)〔지금의 경남 합천〕으로 돌아와 조식의 위패를 봉안한 용암서원(龍巖書院) 원장에 취임하였다. 정인홍과 입재(立齋) 노흠(盧欽)(1527~1601)의 다음 세대에서 남명학파를 이끌면서 임곡(林谷) 임진부(林眞怤, 1586-1657)와 창주(滄洲) 허돈(許燉, 1586-1632) 등 다음 세대로 남명학을 계승하게 하였다.
이흘은 평생 정치적 활동을 한 적이 없고 정치적으로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당을 만드는 것도 싫어하였다. 평소에 “나는 타고난 성품이 남에게 구속을 당하는 것도 남을 구속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가 용암서원 원장이 된 때는 인조반정 직후로 서인 세력에게 북인이 전면적인 탄압을 받던 시기였다. 오히려 그의 생애와 성향이 어려움에 처한 남명학을 보존하고 조식의 정신을 이어가는 데는 더 적합하였던 것으로도 보인다.
학문과 저술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원전
- 『광해군일기』
- 「희정당행장(喜靜堂行狀)」 (조임도, 『간송집』 권5, 행장)
논문
- 한미혜, 「노파 이흘 연구」(경상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주석
-
주1
: 조선 시대에 남명 조식에 의해 이루어진 성리학의 한 종류. 경을 중심으로 하는 수양과 의를 중심으로 하는 의리를 추구하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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