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화보(和甫), 호는 취암(醉菴). 이지훈(李之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식(李埴)이고, 아버지는 한양군(韓陽君) 이흥준(李興畯)이며, 어머니는 한승정(韓承貞)의 딸이다. 이증(李增)의 문인으로 1573년(선조 6) 생원이 되고 158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 뒤 정언·헌납·장령 등 요직을 지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기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헌납이었는데, 당시 양사는 거의 서인일파들이 차지하여 동인으로서 연루자인 최영경(崔永慶)을 국문하다가 옥사하게 하였다.
그 뒤 세자책봉문제로 서인의 영수인 정철(鄭澈)이 실각하자 그를 포함하여 기축옥사 때 양사에 있었던 관리들은 모두 파직되었다. 그 뒤 여러 지방관을 거쳐 문학·장령·헌납 등 중앙요직에 올랐다.
그러나 1602년 최영경 옥사사건이 다시 거론되면서 당시 양사의 관리였던 사람들은 모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이 때 그도 관직을 삭탈당하고 옥구에 귀양을 가서 6년 만인 1607년 풀렸으나 다음 해 죽었다.
1612년(광해군 4) 도승지를, 1623년(인조 1) 이조판서를, 1630년에는 좌찬성을 각각 추증받고 아흥군(鵝興君)에 봉하여졌다. 이는 그의 둘째아들 이의배(李義培)가 인조반정 때에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봉하여졌기 때문이다.
1800년(정조 24) 덕산의 회암서원(晦菴書院)에 배향되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귀양 중에 시집 2권을 쓰기도 하였다. 그의 시와 묘지명 등을 모아 엮은『취암이공실기(醉菴李公實記)』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