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무과에 급제하였다. 초기의 경력은 알 수 없으며, 1612년(광해군 4)에 삭주부사를 거쳐 회양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삭주부사 때 해유(解由: 관원들이 전직할 때 재직중의 회계·물품출납에 대한 책임을 해제받던 일)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파직되었다.
1615년에 전라좌수사가 되었으며, 광해군 말기에는 당시 재상 박승종(朴承宗)과 사돈이었던 까닭에 훈련대장에 임명되었다.
광해군 때에 참훈(參勳)·상가(賞加) 문제로 사헌부 및 사간원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일이 있었으며, 특히 전라좌수사 때에는 약초를 진상하여 가자(加資)를 얻은 일로 사신(史臣)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인조반정 때 주모자들이 거사 날짜까지 잡았으나 박승종과 관계가 밀접한 그가 호위를 맡고 있기 때문에 그를 포섭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장유(張維)가 이흥립의 사위이자 본인 동생인 장신(張紳)을 통해 그를 설득하였고, 마침내 반정군에 가담하였다.
이때에도 미리 고변이 있어서 박승종에게 문초를 받았으나 박승종에게 어찌 공을 배반할 것이냐는 말로 반문하면서 위기를 모면하여 반정은 성공하였다.
인조즉위 후 박승종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대의에 따라 거사에 가담하였으며, 그가 가담한 뒤에야 모두 의견이 정하여졌으므로, 공이 제일 크다고 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의 훈을 받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하여졌으며, 수원부사의 직을 받았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수원부사 겸 경기방어사가 되었으나 이괄의 반란군에 투항하였다가 난이 평정되자 옥에서 자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