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경궁

  • 역사
  • 유적
  • 조선 후기
서울특별시 인왕산(仁王山)에 있었던 조선후기 제15대 광해군이 건립한 궁궐.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박경룡 (서울시사편찬위원회,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서울특별시 인왕산(仁王山)에 있었던 조선후기 제15대 광해군이 건립한 궁궐.

내용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창덕궁을 광해군 때 복구는 하였으나, 광해군은 창덕궁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일부 풍수지리가의 말을 믿고 불길하게 생각하여 이어(移御)를 망설였다.

광해군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交河)에 신궁을 건설하려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간 뒤, 1616년성지(性智)라는 승려가 풍수지리설을 들어 인왕산 아래가 명당이므로 이곳에 궁전을 지으면 태평성대가 온다고 주장하자 이 말에 따라 이 곳에 궁터를 잡게 한 뒤 그 이듬해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공사 도중에 새문동(塞門洞 : 지금의 종로구 신문로일대)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설이 나돌자, 광해군이 이를 누르기 위하여 궁궐을 짓게 한 것이 경덕궁(慶德宮, 또는 경희궁)이었다. 이에 따라 인경궁공사는 거의 중단되다시피하여 1621년부터 본격적인 공사가 계속되었으나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건설공사는 중지되었다.

인경궁은 경희궁에 비하여 규모가 큰 궁궐이었다. 그런데 병자호란 뒤 1648년(인조 26)에 청인(淸人)들의 요구로 홍제원(弘濟院)에 역참(驛站)을 만들 때 청나라 사신들의 숙소 등의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하여 인경궁과 태평관의 건물을 허물어 재목과 기와를 사용하였으므로, 이 후부터 인경궁의 자취는 사라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 『궁궐지(宮闕志)』

  •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 『서울육백년사(六百年史)-문화사적편(文化史蹟篇)-』(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7)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