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때 후궁의 친척으로 아첨하여 총애를 받아 인사문제에까지 관여하여 무리한 일을 많이 자행하였고 탐욕스러웠다.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어서는 온 고을이 텅 비다시피 하였으며, 개성유수가 되어서는 탐독하기가 한이 없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멀리 도망가서 숨었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뒤에 석방되었으나 유효립(柳孝立)의 옥사 때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1629년(인조 7) 양경홍(梁景鴻) 등과 역모에 가담하여 오랑캐에게 흉서를 보냈다는 것으로 몇 차례 심문을 받던 중 장살(杖殺)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