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 1919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반적으로 ‘꾀꼬리 같은 목소리’라는 표현으로 그의 성악가로서의 위치를 평가하였으며, 당시 음악회가 잦지 않은 상태에서 스타적인 존재였다.
피아노연주에도 상당한 기량이 있어서 1919년 YMCA강당에서 열린 경성악대(京城樂隊)의 연주회에 출연하여 피아노를 연주한 기록도 있다. 1920년 미국에 최초로 유학한 그는 오버린대학에서 음악석사학위를 받고 신의주출신의 사업가 김경(金慶)과 혼인한 뒤 시카고 근처에서 정착하였다.
미국에 유학한 현제명(玄濟明)·이유선(李宥善) 등을 도운 일이 있으며, 도미 이전에는 감리교 찬미가에 「금주가(禁酒歌)」를 작사, 작곡하여 기독교와 금주운동의 캠페인에 기여하였다. 같은 시대의 소프라노가수 윤심덕(尹心悳)과 임배세는 대칭적인 음악가로서 양악 유입기에 기여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