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도 출신이다. 3·1운동을 목도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7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9년 북간도 대한국민회 군사령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일본군과의 전투를 지휘하였다.
1920년 6월 경 지나혁명단(支那革命團)을 조직하고, 이진(李鎭)·김강(金强)·강구우(姜九禹)·박만홍(朴萬弘)·황일보(黃一甫)·황병길(黃丙吉)·한대진(韓大振) 등과 함께 실행위원으로 참여해 독립군 무기 구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1년 2월 최진동이 이끄는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의 피복과장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4월 29일부터 의용대원 14명을 인솔하고 국내진격작전을 펴 함경남도 갑산(甲山)·풍산(豊山)·단천(端川), 함경북도 성진(城津)·길주(吉州) 등 각 군을 이동하며 40여 일 간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1921년 10월 최인보(崔仁甫)를 연길현(延吉縣)으로 파견하여 군자금 모집 및 선전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11월 경 장백현 17도구(道溝)에 근거지를 둔, 장백현 내 독립운동 통합체인 군비총단에 입단하여 경호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일본군의 집요한 추격을 받고 군비총단 단원들과 함께 노령으로 이동하였다. 1922년 6월 고려혁명군 연해주 총지부의 남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연해주 총지부는 총재에 이중집(李仲執), 서부사령관 신우여(申禹汝), 총사령관 김규식(金奎植), 남부사령관 임병극, 동부사령관 김응천(金應天), 북부사령관 이용(李鏞)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22년 가을 하마탕, 추풍, 얼두지우 방면에 주둔하여 기병 1중대, 보병 3중대를 거느리고 러시아 백군과 격전하여 승리하였다. 1922년 말 러시아 적군과의 불화로 다시 만주로 돌아와 활동하였다.
1923년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方略)을 모색하기 위한 국민대표회가 개최되자 창조파의 부속대표로 활동하였다. 창조파에서는 임병극 외 김세혁(金世爀), 이청천(李靑天)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사를 양성하고 매년 100∼200여 명의 의열 활동대원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임병극은 이에 따라 연해주와 만주를 오가며 활동하였다.
1924년 9월 14일 연길현(延吉縣) 옹성요(甕聲曜)에서 부하 다섯 명과 함께 중국군에 체포되어 일제에게 인도되었고 징역 15년을 언도받았다.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