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소죽(小竹). 충청남도 부여 출생. 1913년 이승만(李承晩)의 알선으로 미국 오하이오 디킨스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재학 중 『한국학생평론』을 창간하고 편집장이 되어 일제의 한국 강점을 폭로하면서 세계에 독립 지원을 호소하였다. 뒤에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18년부터 1919년까지 3·1운동 당시 독립운동에 필요한 독립운동자금 조달에 진력하고 『한국학생평론』 특집을 발간하였다. 일제의 양민 학살, 잔혹한 고문 만행 등을 사진과 함께 적나라하게 보도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1919년 4월 이승만(李承晩) · 서재필(徐載弼) 등과 같이 필라델피아에서 재미한인대회(在美韓人大會)를 소집하고 서기장으로 독립운동 방안을 토의하는 등 독립투쟁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이 대회가 종료된 뒤 이승만의 비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회(歐美委員會)에서 이승만을 도와 독립운동의 세부적인 방안을 헌의(獻議)하였다.
한국독립을 절대적으로 승인하라고 일본왕에게 보내는 이승만의 서한을 일본공관에 전달하는 등 비서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1920년 6개월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상해 부임을 수행하였다. 1943년 재워싱턴한인협회 수석비서관으로 활동했으며, 1944년 미국전략사령부에 근무하면서, OSS작전을 적극 도왔다.
임시정부 대통령부 무관으로 대령에 임관되어 전시중에도 한미교섭에 크게 활약하였다. 정부수립 후 1949년 외무부장관에 기용되었으며, 1951년 주유엔대사가 되어 한국의 국제적 지위향상에 공헌하였다.
1961년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지냈고, 1964년 주뉴델리총영사 사무취급대사, 1968년 국토통일원고문과 신체장애자재활협회장, 1974년 한국반공연맹이사장 등을 지냈다. 저서에 『소죽회고록』 · 『임정(臨政)에서 인도까지』 등이 있다.
1976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