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진화(進和). 임명필(任明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승지 임윤(任尹)이고, 아버지는 임국로(任國老)이며, 어머니는 한원(韓垣)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가 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사관(史官)이었던 주서 박정현(朴鼎賢), 검열 조존세(趙存世)·김선여(金善餘) 등 4인과 모의하여 사초(史草)를 불태우고 도망한 죄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선조가 환조(還朝: 본궁으로 돌아옴.)한 뒤에 관직에 나가기 위하여 애를 썼으나 겨우 외직에 수차 임용되었을 뿐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그 뒤 1599년 병조좌랑·병조정랑을 거쳐 1604년 서산군수를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원주부사에 임명되었고, 광해군 재위 때에 그의 형 수정(守正)의 첩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내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1613년 형조참의, 1616년 좌승지, 1620년 이조참판·동지경연(同知經筵), 1621년 예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파직되었으며, 그 뒤 1628년 임경후(任慶後)·박동기(朴東起)·이종충(李宗忠)·오현(吳玹)·이후강(李後崗)·안대홍(安大弘)·고경성(高景星) 등과 함께 광해군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인조실록』의 기록에는 그가 궁액(宮掖: 궁중의 하인)의 세를 빙자하여 권병(權柄: 권력을 이용한 힘)을 농단하고 탐욕스럽기가 그지없어 광해군 때의 권세가였던 이이첨(李爾瞻)과 대등하였다고 한다. 1617년 대북파로서 폐모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