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좌승지, 이조참판,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선조가 환조(還朝: 본궁으로 돌아옴.)한 뒤에 관직에 나가기 위하여 애를 썼으나 겨우 외직에 수차 임용되었을 뿐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그 뒤 1599년 병조좌랑 · 병조정랑을 거쳐 1604년 서산군수를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원주부사에 임명되었고, 광해군 재위 때에 그의 형 수정(守正)의 첩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내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1613년 형조참의, 1616년 좌승지, 1620년 이조참판 · 동지경연(同知經筵), 1621년 예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파직되었으며, 그 뒤 1628년 임경후(任慶後) · 박동기(朴東起) · 이종충(李宗忠) · 오현(吳玹) · 이후강(李後崗) · 안대홍(安大弘) · 고경성(高景星) 등과 함께 광해군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인조실록』의 기록에는 그가 궁액(宮掖: 궁중의 하인)의 세를 빙자하여 권병(權柄: 권력을 이용한 힘)을 농단하고 탐욕스럽기가 그지없어 광해군 때의 권세가였던 이이첨(李爾瞻)과 대등하였다고 한다. 1617년 대북파로서 폐모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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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문과 급제 : 『국조문과방목』 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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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광해군 복위 연루 : 『인조실록』 18권, 1628년(인조 6) 3월 4일. "임지후가 역모를 고변하자 관련인을 국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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