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시대 공조좌랑, 무주현감, 문화현령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적이 물러간 뒤에 먼저 서울에 들어가 건학(建學)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며, 다시 김천일을 좇아 남하하는 적을 추격하였으나 상주에 이르러 병을 얻어 귀가하였다. 또한, 전란으로 인하여 많은 유민이 생기자 이를 진휼하는 데 힘쓰기도 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이순신(李舜臣)이 보화도(寶化島)에서 군량이 떨어졌을 때 자기 집의 곡식 수백석을 지출하였으며, 전라도에서 의병을 모아 대장이 되어 8도에 격서(檄書)를 보내 백성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하여 공조좌랑에 보직되었으며 수천의 적병과 대치하면서 고두성(孤頭城)을 지켰다.
이 때 그의 군대는 용맹을 떨쳐 진사군(進士軍)이라는 군호를 얻었다. 뒤에 무주현감·문화현령을 거쳤으나 조정의 권신들의 미움을 사서 끝내는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돌아와 후진양성에 여생을 바쳤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현주집(玄洲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장군경거첩(林將軍瓊琚帖)』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