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중(子中), 호는 습정(習靜). 전라병마우후 임평(林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주부윤 임붕(林鵬)이고, 아버지는 평안도절도사 임진(林晉)이며, 어머니는 남원윤씨 윤개(尹塏)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밑에서 종사관으로서 군무(軍務)를 맡았다. 김천일의 군대가 강화에 진을 치고 있었을 때 당시 수안에 피난하였던 왕세자를 찾아가 남하하여 중흥의 기업을 세울 것을 청하고 사포별제(司圃別提)가 되어 돌아왔다.
적이 물러간 뒤에 먼저 서울에 들어가 건학(建學)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며, 다시 김천일을 좇아 남하하는 적을 추격하였으나 상주에 이르러 병을 얻어 귀가하였다. 또한, 전란으로 인하여 많은 유민이 생기자 이를 진휼하는 데 힘쓰기도 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이순신(李舜臣)이 보화도(寶化島)에서 군량이 떨어졌을 때 자기 집의 곡식 수백석을 지출하였으며, 전라도에서 의병을 모아 대장이 되어 8도에 격서(檄書)를 보내 백성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하여 공조좌랑에 보직되었으며 수천의 적병과 대치하면서 고두성(孤頭城)을 지켰다.
이 때 그의 군대는 용맹을 떨쳐 진사군(進士軍)이라는 군호를 얻었다. 뒤에 무주현감·문화현령을 거쳤으나 조정의 권신들의 미움을 사서 끝내는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돌아와 후진양성에 여생을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