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7년 2월 26일 동궁 해방(亥方)에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귀·눈을 불로 지진 쥐 한 마리를 동궁의 북정(北庭) 은행나무에 걸어놓고 생나무 조각으로 방서(榜書: 써서 걸어둔 글)를 만들어 걸어두었다.
이 때 동궁은 세자궁에 거처하였다. 그런데 그는 해생(亥生)이요, 2월 25일이 생일인 데다가 ‘해(亥)’는 돼지에 속하고 쥐도 돼지와 비슷하므로 당시의 조정 제신들은 동궁을 저주한 것이라 하였다.
이어 3월 초하루에도 이런 사건이 대전(大殿) 침실의 전란(典欄)에서 다시 일어나자, 우의정 심정(沈貞)이 이를 듣고 이유청(李惟淸)과 함께 왕에게 아뢰어 범인의 검거를 청했다.
그러나 범인은 잡히지 않은 채 의혹만 커가서 당시 지목당하고 있던 경빈박씨(敬嬪朴氏)의 소행이라 하여 그의 시녀와 사위인 홍려(洪礪)의 종들이 심문 중 매를 맞아 죽었다. 또한 형벌에 못이겨 거짓 자백한 자도 있었다.
이에 경빈 박씨와 아들 복성군(福城君)은 함께 서인(庶人)이 되어 쫓겨났다. 그 뒤 다시 동궁의 가상을 만들어서 나무패를 걸고 거기에 망측스런 글을 쓴 일이 생겨, 서인이 된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사사(賜死)되었다.
두 옹주를 폐서인으로 만들었으며, 홍려도 매를 맞아 죽었다.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은 밖으로 내쫓겼으며, 좌의정 심정도 경빈 박씨와 결탁하였다 하여 사사되었다.
1532년 이종익(李宗翼)의 상소에 의해 진범이 김안로(金安老)의 아들 희(禧)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안로는 심정과 유자광(柳子光) 등에게 원한을 품어오던 중 아들 희를 시켜 작서의 변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이 사건은 아들이 부마로 있음을 계기로 정권을 농단하다가 권세를 잃게 되자 권세를 만회하고자 한 김안로의 사행(邪行)으로, 당시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