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장연(長淵). 자는 군택(君擇). 아버지는 증 공조참의에 추증된 장희열(張希說)이다.
정묘호란 때 용천의 수비가 매우 소략하여 부사 이희건(李希建)은 성을 버리고 적과 싸우다 죽고자 하였다.
용천(龍川) 교생(敎生)으로 맏형 장흘(張迄)과 함께 군문에 나가 성을 사수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허용되지 않자, 친족들을 모아 집을 지키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9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집을 지켰다.
청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와 10여 겹으로 포위, 항복할 것을 외치며 공격하였으나 일시에 쏜 화포로 많은 군사를 잃고 10리 밖으로 패퇴하였다. 이 때 그의 종형 장우(張遇)가 의병 수백 명을 데리고 와 합세하니 청나라 군사들은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그는 의군을 이끌고 도농도(都農島)로 들어가 지키다가 명나라 도독 모문룡(毛文龍)이 보내준 배로 대계도(大界島)에 가서 의병장 정봉수(鄭鳳壽)와 합세하였다. 모문룡은 이들을 위로하고 명나라에 이를 알렸다.
의장(義將)들이 그의 공적을 조정에 알리려 하였으나 그는 이를 사양하고, 이립(李立)을 주장(主將)이라 하여 이립의 장계를 들고 직접 비변사에 알렸다. 인조는 그를 인견하여 창의항전(倡義抗戰)한 실상을 자세히 듣고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중부주부(中部主簿)를 제수하고, 추파(楸坡)의 만호직(萬戶職)을 주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병사를 모아 만포(滿浦)를 지켰으며, 1653년(효종 4) 고산리첨사(高山里僉使)가 되어서는 삼대호(三大虎)를 잡아 강계 지역의 호환(虎患)을 근절시킨 공로로 효종의 특명을 받아 당상관에 올라 위장(衛將)·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