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말손 초상 ( )

장말손 초상
장말손 초상
회화
유물
국가유산
조선시대의 문신 장말손(張末孫, 1431~1486)의 초상화.
이칭
이칭
장말손 영정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장말손 초상(張末孫 肖像)
분류
유물/일반회화/인물화/초상화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보물(1969년 02월 19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영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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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장말손 초상은 조선 시대의 문신 장말손(1431~1486)의 초상화이다. 정말손은 이시애의 난(1467)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이 된 인물이다. 이 초상화는 그가 연복군으로 봉해진 1482년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초상화는 세로 171㎝, 가로 107㎝이다. 오사모에 단령을 입고 공수 자세를 취한 채 의자에 앉은 전신 좌상이다. 상용 형식이나 복색 등이 초기 공신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안면 처리 필법에서도 초기의 초상 화법을 보인다. 이 초상화는 선 위주로 인물의 요체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회화사적 의의가 있다.

키워드
목차
정의
조선시대의 문신 장말손(張末孫, 1431~1486)의 초상화.
구성 및 형식

196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축(軸). 세로 171㎝, 가로 107㎝. 비단 바탕에 채색. 장말손상의 화폭은 얼굴 부위가 들어 있는 가운데 폭이 대폭(大幅)이며, 양쪽에 두 개의 소폭과 연결된 3폭으로 되어 있다.

내용

세조~ 성종때의 문신 장말손의 자는 경윤(景胤),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그는 이시애(李施愛)의 난(1467) 때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이 되고, 내섬시첨정(內贍寺僉正)에 승진되었다.

화상은 오사모(烏紗帽)에 단령을 입고 삽은대를 착용하고 공수자세를 취한 채 의자에 앉은 전신좌상이다. 상용 형식이나 복색(服色)에 있어서는 초기 공신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흉배 또한 중기 이후의 사라(紗羅)에 수놓은 흉배가 아니라, 명(明)나라 복식 제도를 따른 직금(織金) 흉배여서 고식(古式)을 예시한다. 하지만 그림이 그려진 시기와 관계있는 흉배의 문양은 금실로 수놓은 백한白鷳 문양 으로서 문관 1품을 시사해준다. 그러므로 장말손이 연복군(延福君)으로 봉해진 1482년(성종 13)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초상화를 그리게 된 계기가 적개공신상(敵愾功臣像) 제작에 있었던가가 의심된다. 장말손과 동시대인이자 역시 적개공신이었던 손소(孫昭)와 오자치(吳自治)의 초상화가 각기 종손가에 전존되어오고 있다. 이 세 영정은 화폭, 상용 형식, 표현 기법에서 모두 동일하다. 이것은 결국 이 세 초상화가 같은 시기, 같은 화사에 의하여 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각적인 증거 외에도 손소의 문집인 『양민공유사(襄敏公遺事)』의 연보항목을 보면, ‘헌종황제 성화12년 병신(공의 나이 44세)에 임금이 충훈부에 명령하여 모든 공신상을 그려서 내려주니 본가에 보관하게 하였다.[憲宗皇帝 成化十二年 丙申(公四十四歲) 上命忠勳府 圖畵諸功臣像 賜給藏于本家]’는 구절이 수록되어 있다. 즉, 적개공신상은 공신호가 사여된 1467년(세조 13)부터 거의 10년이 경과한 뒤 그려진 것이 된다. 그러므로 장말손 영정 역시 적개공신 사여 후 한참 있다가 그려졌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 작화 계기는 어디까지나 공신호책록에 있었음도 아울러 살필 수 있다.

오사모는 초기에서 중기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형태를 보이고 있다. 왼쪽 단령이 트여 사이로 비치는 붉은 내공과 녹색 답호, 그리고 공수한 틈새로 보이는 흰 속옷 소매, 의자의 형태, 가지런히 한 방향으로 놓인 백피혜(白皮鞋), 원근법에 구애되지 않은 족좌대(足座臺) 등이 모두 조선 초기 공신도상의 특색을 보여 준다. 또한 채전이나 돗자리가 깔려 있지 않아 배경에 대한 인식은 아직 들어 있지 않음이 보인다.

그러나 중기 이후의 초상화로 연결되는 하나의 특색으로서 7분면의 취세를 표현하고 있다. 화가는 이미 상(像)그리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 인물의 취세를 개발하였다. 이 점은 중기 이후에는 거의 획일적으로 구사되는 면이다.

필법에 있어서 장말손상은 안면 처리에 있어서도 초기의 초상화법을 예시하고 있다. 안색은 황색 살빛으로 시채한 뒤 갈색선으로 윤곽을 잡았는데 선염기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입술은 살빛보다는 홍기 나는 색으로 칠하였으나,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 당시만 해도 중기 초상화에서 보이는 고심세(高深勢: 안면에서 높고 낮음의 표현)의 시도는 전혀 없다. 물론 육리문에 대한 이해도 역시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골격 자체에 대한 것은 충분히 인식한 듯이 인물 윤곽의 완연함과 함께 눈매의 표정이 탁월하다. 그리고 눈초리에는 이미 갈색계의 홍기가 미세하게 삽입되어 있다.

옷주름 처리에 있어서는 의복의 외곽선을 마치 풀 먹인 듯 빳빳한 직선으로 처리하였다. 이것은 목 위로 바짝 올라간 녹색 답호와 어우러져 엄숙한 분위기를 준다. 굴곡진 주름은 가시적인 몇 개의 주름만을 발췌하여 그것을 간결한 비수(肥瘦) 없는 묵선으로만 포착하고 있다.

장말손 영정의 회화사적 의의는 몇 안 되는 초기 공신상 중 하나라는 점 이외에도 선 위주의 표현 수단을 가지고 대상 인물의 요체를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세조실록(世祖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양민공유사(襄敏公遺事)』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초상, 형상과 정신을 그리다』(한국국학진흥원, 2009)
『한국의 초상화 -형과 영의 예술-』(조선미, 돌베개, 2009)
「조선왕조시대의 공신도상에 관하여」(조선미,『고고미술』151, 한국미술사학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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