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목포 출신. 1919년 3월 18일 전라남도 무안에서 고종황제의 안장식(安葬式)을 거행한다고 집합시킨 주민 수천명에게 대한독립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연설하고 선두에 서서 군중을 영도하며 시위하다가 잡혀 3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 뒤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1927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의원으로 선임되어 독립운동의 통일전선을 위하여 힘썼다. 1920년초 군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귀국하여 서울에서 이동욱(李東旭) 등과 3·1 운동 1주년기념식을 대대적으로 벌이려고 계획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29년 신간회(新幹會) 목포지회장에 취임하였으며 뒤에 중앙대표로 선출되었다. 이 때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민중대회운동을 서울에서 열었을 때 이에 관련되어 잡혔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