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달산(達山). 밀직부사(密直副使) 장홍(張弘)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1363년(공민왕 12) 11월에 1359년(공민왕 8) 홍건적(紅巾賊)의 제1차 침략을 물리친 공으로 서운정(書雲正)으로서 기해격주홍적이등공신(己亥擊走紅賊二等功臣)이 되었다.
1378년(우왕 4) 왜구(倭寇)의 화를 피하기 위하여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로서 정당문학(政堂文學) 권중화(權仲和)와 함께 북소(北蘇) 기달(箕達: 峽溪)에 가서 궁궐의 터를 보고 왔다. 이때의 천도는 북소조성도감(北蘇造成都監)까지 설치하여 진행되는 듯 했지만 끝내 성사되지 못하고 중지되었다.
1382년(우왕 8) 2월에는 판서운관사로서 왕에게 글을 올려 경성(京城: 개성)에 괴변이 자주 일어나므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우왕은 그 글을 도당(都堂)으로 보냈으나 이인임(李仁任)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였으므로 그 문제가 중지된 적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천도 논의는 여러 번 있었지만, 대몽항쟁기 강화천도(江華遷都)를 제외하면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었다. 그것은 개경을 기반으로 한 정치세력들의 반대가 가장 큰 이유였다.
장보지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1392년(공양왕 4) 조선 건국 후 머리를 깎고 미달산(迷達山)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