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흥덕(興德). 1388년(우왕 14) 별장으로 있으면서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이 지공거를 맡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1398년(태조 7) 감승(監丞) 역임 시 순군(巡軍)에 갇혔다가 풀려 나왔으나 소유했던 전민(田民)을 전민을 강제로 국가에 헌납하였다.
태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등용되어 1413년(태종 13) 강원도·영길도(永吉道)의 경차관(敬差官)으로 나가 민간에 쌓인 폐단을 교정하는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이어 1418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때 잘못이 없는 안성군수 권상온(權尙溫)을 탄핵하고 취조한 일로 도리어 파직되고 의금부에 하옥되어 곤장 60대를 맞고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곧 직첩이 환급되었으며, 세종이 즉위하고 태종이 상왕으로 있을 때 의금부진무로 있으면서 일을 민첩하게 잘 처리해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또한, 친척인 당시의 권세가 박은(朴訔)이 여러 차례 천거해 판전사(判典祀)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로 옮겼으며, 병조의 지병조사(知兵曹事)를 겸하는 등 세력을 떨쳤다.
곧 이어 병조참의로 승진했으며, 이 때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것을 기화로 상왕의 교지를 누설시켰으나 상왕의 배려로 무사하기도 하였다. 1419년(세종 1) 이조참의를 거쳐 이듬 해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 권세를 믿고 공공연히 뇌물을 받을 뿐만 아니라 공무를 빙자해 사복을 채웠으나 권세가 무서워 아무도 탄핵하지 못했다.
1421년 전라도수군처치사(全羅道水軍處置事) 박초(朴礎)와 영암군수 박희중(朴熙中)이 50여 조목에 이르는 자신의 비리를 폭로하자 박은 등 권세가에게 뇌물을 바치며 구명운동을 하는 한편, 증거 인멸을 위해 감영의 창고를 불태워버리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파직되고 1422년 부여에 귀양가 있던 중 죽었다. 태종의 근신으로 총애를 받았으나 비루하고 탐학했으며 자신보다 뛰어난 자를 미워하는 등 시기심이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