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녹담거사(鹿潭居士). 장차방(張次房)의 아들이다.
입신양명에 뜻을 두고 웅혼(雄渾)한 마음을 기르고자 그의 나이 25세인 1768년(영조 44)에 남제주의 산방산(山房山)을 오르고, 이듬해에는 한라산을 정복하였다.
1770년 향시에 합격한 뒤 이 해 12월 25일 대과에 응시하고자 장삿배를 타고 29명의 일행과 함께 제주항을 떠났으나 풍랑을 만나 유구(琉球)의 호산도(虎山島)라는 무인도에 표착하였다. 갖은 고생 끝에 1771년 2월 3일 서울에 도착하여 3월 11일 식년전시(式年殿試)에 응하였다.
그러나 실패하고 5월 8일 귀가하여 「표해록(漂海錄)」을 지었다. 1775년 5월 26일 친림근정전 경과 정시문과(親臨勤政殿慶科庭試文科)의 별시에 합격하였다. 벼슬은 대정현감, 강원도 흡곡현령(歙谷縣令) 등 말직에 머물렀다.